“사상가, 그리고 재단사.”

지난 2월 뉴욕타임스(NYT)는 한국계 패션 디자이너 시키 임(34·한국명 임상균)을 다룬 기사에 이런 제목을 달았다. 기사는 임씨에 대해 “재단(테일러)의 새로운 문법을 제시했다”며 “그는 매우 이상해 보이는 남성복을 정교하게 디자인했는데, 그 이상함은 상업주의가 판치는 뉴욕 패션계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썼다. 시키 임의 디자인은 전통적인 패션 디자인의 틀을 깬 것으로 평가받는다. 여성의 전유물인 치마를 남성복에 사용했고 중동 사람들이 입는 긴 도포를 독특한 재단을 통해 서양식 현대복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글로벌화에 대한 나만의 철학, 장 보드리야르 등 사회학자들로부터 배운 비평적 사고가 내 디자인의 토양이 됐다”고 말했다. 뉴욕의 스타 디자이너로 떠오른 시키 임을 소호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최근 뉴욕에서 가장 주목받는 패션 디자이너인데 그 이유는.

“전형적인 패션 디자이너들과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시즌마다 다르게 제시해온 나만의 스토리를 좋아해주는 것 같다. 그동안 비슷한 느낌의 디자인을 유지하면서 서로 다른 주제들을 표현해왔다. 지난 시즌에는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 전 시즌에는 아랍의 봄, 그 전 시즌에는 미국 원주민(인디언)을 주제로 디자인을 했다. 건축가라는 독특한 경력도 사람들이 흥미 있어 하는 것 같다. ”

▶건축가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지루함 때문이다. 건물을 하나 짓는 데에는 5년은 족히 걸린다. 일을 지연시키는 너무 많은 변수들이 있다. 반면 패션은 빠르고 감각적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특정한 분야가 아닌 디자인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건물뿐 아니라 의자, 테이블, 옷, 음악 등 모든 것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로 나를 정의하고 싶다. 그래서 2년 전 현대자동차의 컨셉트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디자인 세계에서는 이렇게 분야 간의 벽을 허무는 것이 추세다. 대한항공 승무원 유니폼을 디자인한 지안프랑코 페레도 건축을 전공했다.”

▶지금 하는 일이 만족스럽나. 건축이 그립지는 않나.

“나는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않는다. 물론 건물을 디자인하는 일이 그립다. 사실 건축을 완전히 그만둔 것은 아니다. 패션 회사가 좀 더 안정되면 몇 년 후에 다시 건축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패션 디자인과 건축을 같이 하면 심미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작년에 ‘아랍의 봄’을 디자인의 모티브로 삼았다. 이유가 뭔가.

“독일에서 한국인으로 자라면서 서로 다른 문화 간의 충돌에 대해 늘 관심을 가져왔다. 중동·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을 다니면서 그곳의 문화에 매료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아랍의 봄’이 시작됐고 세계화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가 됐다. 중동인들은 음악, 패션 등 서구 문화에 상당히 큰 영향을 받았다. 아랍의 봄을 통해서는 서구식 민주주의까지 원했다. 반면 서구인들이 중동에서 들여온 것이라곤 기름밖에 없었다. 글로벌화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라면 서구와 중동 간의 관계는 진정한 글로벌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난 시즌 컬렉션의 제목을 ‘글로벌화의 지형학’이라고 지었다.”

▶패션을 통해 중동의 문화를 서구에 도입하고 싶었던 건가.

“중동 문화를 도입한다기보다는 심미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두 문화를 조화시키고 싶었다. 양쪽의 문화가 결합하면 어떤 모습이 될지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원래 토착적인 옷을 좋아한다. 중동 남자들이 긴 원피스에 재킷을 걸쳐 입는 것이 너무 멋있었다. 이를 영국식 재단 등 서양 기술을 통해 재해석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과 서구의 문화를 조화시키는 작업에는 관심이 없나.

“하나의 인종 그룹으로 나를 제한할 생각은 없지만 한국이 내 디자인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기억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 ‘청학동’이라는 제목의 사진책이다. 책에 나오는 옷은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색의 한복이 아니라 농부들이 입는 하얀색의 일상복이지만 잘 디자인된 한복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2010년 가을 컬렉션에서 고무신과 한복 바지를 디자인에 가미했지만 충분치 않다. ‘청학동’ 등 여러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고 있다.”

▶한국 부모들은 자식들이 변호사나 의사가 되기를 원한다. 어떻게 디자인을 시작하게 됐나.

“운 좋게도 ‘쿨한’ 부모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예술을 좋아했고 무언가 만드는 일에 심취해 있었다. 예를 들어 유치원 때에는 레고로 큰 건물을 만들었고, 초등학교 때에는 자전거 5개를 해체해 하나의 자전거로 조립했다. 중학교 때는 학교 신문의 그래픽 디자인과 극장 포스터 디자인을 하기도 했다. 17살에 처음으로 개인 사진전을 열었고 고등학교 내내 기타리스트와 보컬로 밴드에 참여했다. 부모님은 나의 그런 열정을 지지해주셨다.”

▶사회학이 패션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해체이론(deconstructionist)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들의 정치적 성향보다는 비평적 사고를 좋아한다.”

▶많은 한국 젊은 디자이너들의 ‘롤모델’이 됐다. 이들에게 조언이 있다면.

“예술적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좀 더 ‘오픈마인드’이어야 한다. 뉴욕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은 대부분 한인 타운에서 자기들끼리 어울린다. 한국의 선후배 문화는 서로에게 굉장히 도움이 되는 문화이지만 나 자신이 되는 것, 즉 개성을 발휘하기에는 어려운 문화다.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국은 남과 다른 생각을 하기 쉽지 않은 환경인 것 같다.”

파슨스스쿨 교수 시키 임 누구인가…헬무트 랭이 '롤모델'

독일 쾰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독일 화학회사 바이엘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이후 서울을 포함한 여러 도시에서 건축가로 일하다 2001년 뉴욕으로 건너가 패션 업계에 뛰어들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영웅이자 ‘롤모델’이었던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 헬무트 랭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랭과 칼 라거펠드 밑에서 선임 디자이너로 일하며 생산, 마케팅, 영업 등 패션 비즈니스에 대해 공부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던 창의적인 일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해 2009년 독립했다.

2010년 초 뉴욕 신진 디자이너의 등용문으로 평가받는 에코 도마니(Ecco Domani) 어워드를 받았다. 2011년에는 제일모직이 주는 삼성패션디자인펀드(SFDF)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전 세계에 시키 임(Siki Im) 브랜드로 의류를 판매하며 뉴욕의 명문 패션스쿨 파슨스(Parsons)에서 선임 조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Siki’라는 이름은 유치원 시절 한국 이름인 상균의 이니셜 ‘SK’에 알파벳 ‘아이(i)’를 삽입해 만들었다. 그는 “한국식으로는 마치 욕처럼 들리지만 일본에서는 ‘색(色)’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문화에 대해 “전통 문화에 좀 더 자신감을 갖는다면 전 세계 문화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