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푸스 데이'와 '프리메이슨'.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오푸스 데이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에 등장한다. 프리메이슨은 '로스트 심벌'을 비롯한 많은 소설책에 나온다. 공통점은 '은밀한 조직'이라는 점이다. 소규모 조직이지만 세계를 좌지우지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끔은 오푸스 데이나 프리메이슨 같은 보이지 않는 조직의 존재를 느껴봤다는 직장인이 적지 않다. 그런가하면 가끔은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동료도 마주친다. 전화 한통에 '높으신 분'들과 바로 연결되는 '사내 프리메이슨'의 일원이 되고자 목을 길게 빼고 있는 동료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각종 인연이나 취미에 따른 모임이 대부분이지만,이른바 직장 내 '이너서클'은 김 과장,이 대리들이 비껴갈 수 없는 존재다.

◆동호회 운명은 '그분'의 취향 따라

사내 동호회는 바쁜 직장인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활력소다. 동호회를 통해 사귄 사람들은 직장 내에서 알게 모르게 든든한 '우군'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동호회가 항상 순수한 것만은 아니다. 회사 최고경영자(CEO)의 취향이나 학연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국내 한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김모 과장(34)은 오디오 마니아다. 대학 시절부터 오디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전문가 뺨치는 수준까지 올랐다. 이런 김 과장에게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회사 내에 오디오 동호회가 생겼다는 것.기쁜 마음에 김 과장은 바로 동호회에 가입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동호회 회원은 부장급과 상무나 전무 등 대부분 임원급이었다. 과장급은 김 과장이 유일했다. 대리 과장들이 대부분인 다른 동호회와는 달랐다.

사정을 알고 보니 최근 새로 취임한 사장님이 오디오 마니아였다. 눈치가 뻔한 임원들은 너도나도 오디오 동호회에 가입했다. 이런 영문을 모르고 동호회에 가입한 김 과장은 주변 동료로부터 "과장이 벌써부터 사장에게 잘 보이려고 오디오 동호회에 가입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김 과장은 "동호회는 3년 뒤 사장이 바뀌자마자 해체됐다"고 말했다.

◆'오너'와 같은 학교에서 유학했다면

대기업 글로벌마케팅실에서 일하는 이모 과장(37)은 한 달에 한 번 이름없는 모임에 꼭 참석한다. 모임에 나오는 사람은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선후배 10여명.미국의 같은 대학 MBA(경영학석사) 출신 모임이다. 중요한 건 모임의 이름이 아니다. 이들이 나온 대학은 바로 회사 오너의 모교다. 모임 때 '그분'이 참석한 적은 없지만 연말이면 어김없이 금일봉을 전달해주곤 한다.

모임은 고등학교 동창회 못지않게 끈끈하다. 회사 오너와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동질감은 물론 대부분 인원이 회사의 요직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남는 게 많은 모임이다. 자신들 스스로를 회사의 이너서클로 생각하고 있어 모임에 대한 외부발설은 금지돼 있다. 모임 역시 회사와 멀리 떨어진 장소를 잡는다. 이 과장은 "놀고 마시는 여느 모임과 달리 회사 내 위상을 차근차근 다지고 사내 중심 세력에 있다는 생각에 뿌듯해지곤 한다"고 말했다.

◆'얼리 어답터'들의 비공식적 이너서클

최근엔 트위터나 아이폰 등 '핫 트렌드' 위주로 이너서클이 만들어진다.

박용만 ㈜두산회장(@solarplant),정용진 신세계 부회장(@yjchung68),김낙회 제일기획 사장(@admankim) 등 '사장님'들이 트위터족이 되면서 대기업 사원들도 부지런히 트위터족 대열에 합류하는 추세다. 대표적인 트위터족 회장님을 둔 한 대기업에 다니는 최모씨(30)는 자타가 공인하는 '레이트 어답터'지만 최근 더듬더듬 트위터를 시작했다. "어제 회장님이 트위터에 올린 거 봤어?"란 사내 대화에 소외되었다가는 젊은 나이에 '고물' 취급을 받을 거라는 두려움에서다.

최근 IT기업으로 전직한 윤모 대리(32)는 수십만원대의 위약금을 물고 아이폰을 구입했다.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가 아이폰에 있는데,그거 하나 안 사고…"란 부장의 눈흘김을 정면으로 받고부터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폰 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판기 앞에서 커피 한잔,흡연실에서 담배 한대를 피우는 중에도 아이폰 사용자끼리 자연스럽게 '이너서클'이 형성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평소에는 말을 걸 기회도 없었던 타 부서 부장들도 아이폰을 들고 있는 윤 대리에게 "자네는 어떤 앱을 쓰나"라고 먼저 물어오기도 한다. 윤 대리는 "같은 앱을 다운로드받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 사내 동호회를 두세 개 가입한 효과가 있다"고 싱글벙글했다.

◆부담없는 이너서클 군대,동네

순수한 마음으로 모임을 꾸리고 싶은 김 과장,이 대리들은 소박한 공통분모를 찾기도 한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김모 과장(33)이 이끄는 사조직의 핵심은 군대다. 학교와 고향을 따져 학연과 지연 위주로 어울리다 보면 여기저기 줄을 대는 정치적인 인간으로 비쳐질 수도 있어서 싫었다. 군대는 왠지 그런 부담이 없었다.

게다가 김 과장은 군대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특전사 출신이다. 대학 시절 ROTC를 지원해 대학 졸업 후 특전사를 갔기에 희소성도 있다. 일단 사내 ROTC 모임 총무를 맡았다. 후배들도 많지만 대부분 부장 이상인 선배들이 많아 거국적인 ROTC 모임을 가면 허리 역할을 한다. 가끔 술이 당기는 날에는 "35기 밑으로 다 모여"라며 자기 아래 후배들을 불러 모은다.

중견기업에서 일하는 이모 대리(32)는 동네 추종파다. 귀갓길에 한 잔이 생각날 때 비슷한 지역에 사는 선후배에게 '번개'를 친다. 동네 모임 역시 다른 사조직에 비해 오해를 덜 받는다. 단순히 비슷한 곳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주 보게 되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 친구가 없어 심심한 이 대리는 삼목회(셋째주 목요일),사수회(넷째주 수요일),말화회(마지막주 화요일) 등 각종 요일을 핑계대거나 "비가 온다" "첫눈이다"라는 괜한 날씨를 구실로 툭하면 동네 모임을 갖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참여했다간…

사내에 비공식적으로 형성된 각종 모임에 참여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무 생각 없이,순수한 동기로 참가했지만 이런저런 뒷말을 듣기도 한다.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유모 대리(33)는 신입 사원 시절 멘토였던 한 선배를 아무 생각 없이 따랐다가 "너 벌써부터 줄타기냐?"라는 비아냥거림을 당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문제의 선배는 빼어난 업무 능력과 탁월한 인간 관계를 갖고 틈만 나면 동료들을 불러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어느 날 유 대리는 다른 상사로부터 "네가 그 라인 하나 믿고 그렇게 까부느냐"는 소리를 듣고 대경실색을 했다. 급히 변명을 해보았지만 "네가 그 사단이면 모든 게 해결되는 줄 아나 본데,너 좀 조심해"란 쓴소리만 들어야 했다. 알고 보니 그 선배는 사내 출세를 염두에 두고 부지런히 동료 및 후배들을 포섭하는 야심가였던 것.유 대리는 "억울한 마음이 들면서도 왠지 선택받은 기분이 들어 뿌듯하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어떤 라인으로 분류되는 게 직장생활에는 마이너스 요소가 더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고운/이관우/이정호/김동윤/이상은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