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의과대학 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보내던 20대 후반의 한 청년은 3억원을 쥐고 고민에 빠졌다. 서울 중구 초동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경영하던 부친이 "병원을 확장해 보라"며 맡긴 돈이었다.

고심 끝에 그는 강남지역 병원 신설을 결정했다. 그때만 해도 강남은 아직 허허벌판이었다. 환자가 끊이지 않던 초동의 병원을 확장하라고 했더니 인구도 많지 않은 강남행을 택한 아들의 행동에 부친은 펄쩍 뛰었다. 하지만 청년 의사는 자신의 결심을 꺾지 않았다. 부동산중개소를 찾아 강남 지도를 펼쳐 들고,4등분한 곳의 중심을 낙점했다. 지금의 강남구 역삼동에 차병원을 설립한 차광렬 차병원그룹 회장(58) 얘기다.

차 회장은 이 병원을 불임 치료의 세계적인 메카로 육성했다. 이를 터전으로 국내외에 12개의 병원과 1개 대학,9개의 연구소와 16개의 회사를 일궜다. 하지만 그가 꾸는 꿈은 더 원대하다. 그는 요즘 미래의학의 트렌드인 줄기세포 치료제 개발과 안티에이징 치료를 전담할 멀티콤플렉스 개원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개론' 공부 소홀히 않는 '연구자 맏형'

1985년 10월,차 병원은 서울대병원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시험관 아기'를 탄생시켰다. 이듬해에는 한 단계 더 발전한 '나팔관 아기'를 출산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폐기되는 미성숙 난자를 체외배양한 뒤 임신(1988년),난자를 냉동보관한 뒤 해동 후 임신(1998년) 등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은 굵직한 연구 성과를 쏟아냈다. 이에 힘입어 차 회장은 '타임''뉴스위크' 등 해외 유력 주간지에 표지모델로 등장했고, 국제학회에 100여 차례 특별강연자로 초대되는 등 이름을 떨치게 됐다.

그는 1984년부터 2년 반 유학하는 동안 독하게 공부했다. 영어 소통 능력이 달려 처음 1년간은 잠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다. 어떻게든 선진 불임치료 기술을 배워보겠다고 연구에 매진,유학 기간 11건의 논문을 발표했다.

귀국해서는 차병원 연구자들의 '맏형'을 자임했다. 세계적인 줄기세포 전문가로 손꼽히는 정형민 차병원 통합줄기세포치료연구센터 소장이 대표적인 연구 동반자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정 소장을 발굴해 의학자의 길을 걷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차 회장이 의대를 설립한 동기 중 하나도 길게는 20년,짧게는 10년 넘게 밤샘하며 연구에만 매달려 온 박사급 연구원을 대접해 주기 위해서다.

단과대학인 CHA의과학대에 재직하는 교수는 400여명.이 중 차병원의 성광의료재단에서 출연한 기금으로 월급을 받는 교수가 300명에 가깝다. 매년 연구비에 쏟아붓는 돈이 100억원에 달한다. 국가가 육성해야 할 생명공학 분야를 대학에서 대신하고 있다는 게 차 회장의 큰 자부심이자 불만이기도 하다.

차 회장은 지금도 세포생물학 개론 등을 밑줄 그어가며 숙독하고 있다. 명색이 전문가인데 웬 개론 공부냐고 물으면 "학문 발전 속도가 빨라 옛것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부단히 새로운 것을 집어넣어야 한다"며 "개론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되받는다.

◆철저한 연구와 과감한 투자

차 회장은 벌이는 일마다 성공을 거뒀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당시엔 '무모한 도전'이라는 비판을 받기 일쑤였고,'운 좋게 거둔 성공'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가 많았지만 그에겐 '사투 끝에 얻은 성공'일 뿐이다.

2004년 국내 최초로 미국 종합병원을 인수했다. 미국 본토에서 한판 붙어보겠다고 LA할리우드장로병원을 매입한 것.이 프로젝트는 그가 겪은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험대였다. 미국의 복잡한 의료보험제도,미흡한 의료사고 대응 능력,보건당국의 인종차별적인 대우 등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인수 후 2년 동안 미국에 상주하면서 현지 병원경영 전문가로부터 매주 두 차례 '특별과외'를 받고,밤마다 병동을 순회하는 등 현지 인력을 한국적인 정서로 포용하고 나서야 경영이 정상 궤도에 들어섰다. 그는 "돈만 있다고 미국에 진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란 말로 그간의 고충을 토로했다.

의료계에서 처음으로 2001년 줄기세포 치료제 개발업체인 차바이오텍을 설립한 것이나,2008년 말 IT기업인 디오스텍을 합병해 코스닥에 차바이오앤디오스텍을 우회상장한 것도 의료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다.

그는 이 같은 도전적인 투자 결정을 어떻게 내릴까. 무엇보다도 다양한 분야의 책과 신문의 경제기사를 꼼꼼히 읽는 데서 시작한다. 수십년간 차병원의 '창업 공신'으로 머물면서 연구 · 재무 · 섭외 · 홍보 등에서 제몫을 다하고 있는 참모들의 도움도 받는다. 하지만 그 자신이 바이오 · 경영 전문가로서 그동안 닦아놓은 국내외 인맥으로부터 힌트를 얻고 이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업구상이 나오는 것 같다고 측근들은 전한다.

◆"일을 벌였으면 끝장을 봐라"

차 회장은 고교 1학년 때까지 별 생각 없이 놀고 운동하는 학생이었다. 고2 때부터 공부해 연세대 의대에 들어가 본과생 이후엔 '올A' 성적을 받았다. 지금도 영감이 오면 밤새도록 전문서적을 탐독한다. '중 · 고생 시절 충분히 놀아본 게' 남다른 집중력과 체력의 원천이 아닐까 스스로 생각해 본다.

그는 간결하고 소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질문을 받으면 불과 몇초도 안 돼 답이 튀어나온다. 그만큼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평소 사고체계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그의 사무실은 수시로 바뀐다. 최근엔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을 차병원그룹 부회장으로 영입하면서 강남차병원에 있던 자신의 사무실을 내주고 인근 세포성형센터의 3평 남짓한 방으로 일터를 옮겼다. 소파도 없이 원탁에 수북한 각종 자료와 몇권의 전문서적이 그의 바쁜 일상을 말해 준다. "일만 하면 되지 큰 집무실이 왜 필요합니까.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서 골프도 거의 치지 않아요. "

그룹 내 12개 산하 병원에 대해서도 한 달에 한 번 결재하는 것 말고는 거의 경영지시를 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부터 병원 경영에서 거의 손을 떼 지금은 신사업 구상에만 집중하고 있다. 다만 성적표를 보고 인사로 대답한다는 게 그의 경영방식이다.

◆줄기세포 · 안티에이징 향한 새로운 도전

차 회장은 요즘 미래의학의 핵심이 줄기세포치료와 안티에이징에 달렸다는 판단 아래 거침없이 관련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미국 ACT사와 공동 개발 중인 배아줄기세포 유래 망막상피세포 치료제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으면 올해 안에 임상시험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와 함께 줄기세포 치료제의 개발과 생산을 위해 판교 테크노밸리에 통합줄기세포연구센터(연면적 6만6100㎡,건축비 1000억여원),분당에 국제줄기세포메디클러스터(16만535㎡,5000억원) 설립을 추진 중이다.

오는 6월 말 서울 청담동에 열 국내 최초의 안티에이징 멀티콤플렉스(1만9835㎡,1500억원)도 차 회장의 미래 예측에서 나온 작품이다. 안티에이징 하면 흔히 항산화식품,호르몬 치료,피부 · 성형 치료가 전부인 것으로 알지만 여기에 세포 치료,피트니스,노화 예방,유비쿼터스 건강관리,휴식,레저를 보강해 세계 최강의 안티에이징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이같은 참신한 시도에 미국 상원의원들도 한번 만나자고 요청해 올 정도다.

"앞으로 20년 내에 120살까지 사는 세상이 도래할 터이니 안티에이징 시장은 무궁무진하죠.의료관광객도 몰려올 것이고.더구나 우리는 세포 치료에 기반을 둔(cell based) 안티에이징 기법입니다. 멀티콤플렉스는 '건강하게 천천히' 늙는 비법을 선보일 겁니다. " 하지만 이 같은 막대한 투자에 부담은 없을까. "세계적인 연구실적을 신뢰하고 투자하는 분들이 고마울 뿐이죠.우리의 능력을 믿지 않으면 아무도 이런 거액을 빌려주지 않았을 겁니다. "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