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올해 대학에 들어가는 학생들에게 추천하는 책의 목록을 보았다. 매년 겨울방학 때마다 이와 비슷한 독서 권유들이 마치 연례행사처럼 이루어진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책들도 어김없이 소개된다. 고교 3년 동안 대입준비에 정신없었을 예비 대학생들에게 기초 소양을 기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취지일 터이다.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독서를 생활화해야 한다는 당위성만으로도 도서추천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추천된 책들을 보면 하나같이 어려운 책들뿐이다. 중 · 고등학교 시절 여유를 가지고 책 한 권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입시 지옥 속에서 자라온 아이들이 소화해내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것들이다. 이 아이들이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읽은 책들이 얼마나 되겠다고 목록의 절반 이상을 어려운 역사서와 사상서,철학서들로 채웠는지 궁금하다. 물론 그런 책을 추천한 사람들은 '대학생이라면 이 정도 책은 읽어야지'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심혈을 기울여 이런저런 책들을 선정해 권유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땅에 입시 지옥이 없다면,그래서 그 아이들 모두 중 · 고등학교 시절 그들의 나이와 지식에 맞게 체계적으로 독서를 해왔다면 그런 어려운 책들도 무난히 읽을 수 있고,또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글을 안다고 해서 어떤 책도 읽을 수 있으며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어려운 내용의 책도 다만 이해가 문제이지 그것이 한글로만 쓰여져 있다면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도 소리내어 읽을 수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런저런 시험에 치여,또 학교 공부에 치여 교과서 밖의 것으로는 한국의 단편소설 열 편도 채 읽지 않은 사람이 열에 아홉인 게 우리 현실일 터이다. 그런 아이들이 어느날 대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전문가들의 추천 서적을 읽을 수 있을지,나는 그런 캠페인이나 권유문을 볼 때마다 일말의 의문부터 먼저 든다. 수학에도 단계라는 게 있지 않은가. 더하기를 알아야 빼기를 알 수 있고,곱하기를 알아야 다음 단계로 나누기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또 분수를 알아야 소수를 알게 되는 것 아닌가.

몇 년 전의 일이다. 어떤 단체에서 대학 신입생들이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해서 내 나름대로는 이런저런 정황을 종합해 책 열 권을 추천해줬다. 그 책들은 그야말로 그 아이들이 중학생 시절에 읽었어야 했음에도 분명 대다수는 읽지 않았을,독서 훈련의 입문서와도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내가 추천한 책들은 대학생들이 읽기엔 너무 수준이 낮아서 제외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다음부터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책 추천을 해본 일이 없지만,어떤 일이든 전 단계와 다음 단계라는 게 있고,훈련과정이라는 게 있다. 나는 독서 역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머리만 커졌다고 어느날 갑자기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독서야말로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얼마 전 어느 대학에 초청강연을 갔다가 내가 직접 알아본 일 하나를 얘기하는 것으로 이 얘기를 마쳐야겠다. 문과대 학생 150명쯤 함께 한 자리였는데,이 중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어본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자 고작 두 명이 손을 들었다. 물론 읽었지만 손을 들지 않은 사람 한두 명이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는 그들이 단지 대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습관적으로 헤겔을 권하고 칸트를 권하고 에리히 프롬을 권한다.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내용이 쉬운 거라면 왠지 대학생이 읽을 책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추천도서 때문에 젊은이들이 오히려 책을 멀리할까 두려운 게 바로 우리의 독서 현실인 것이다.

이순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