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니 정치적인 사건들이 많이 떠올랐다. 그래서 계유정난부터 임오군란, 그리고 1960년의 4.19혁명까지 다뤘다. 이 서대문 밖이 '혁명의 성지'로 느껴지기도 한다.

정치적인 사건들을 설명하기 전에는 충정로의 문화 예술 콘텐츠들을 들여다 봤다. 김환기, 김중업, 이중섭, 김수영, 동양극장의 무용수 배구자, 요화 배정자까지…

이곳 성문 밖에는 정치와 문화 예술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수많은 서사들이 넘쳐 난다. 성문 안의 엄격한 규율 속 양반들의 모습과 달리 숨통이 트이는 곳이라서 일까?

오늘 이야기도 우리 현대사에서 잊혀지지 않을 정치적 사건에 관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최고 부자 3인방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민영휘와 김성수, 최창학이다. 민영휘의 아버지 민영준이 돈 버는 방법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관직을 알선해 주는 대가로 큰 돈을 벌었는데 벼슬을 원하는 사람이 찾아오면 상납금을 높게 부른다. 벼슬을 사려는 사람은 곰곰이 생각한다. 벼슬도 좋지만, 상납금이 너무 커 전 재산을 날릴 판이다. 고민하다 다시 민영준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벼슬을 사지 않겠다고(마다) 한다. 민영준은 이미 윗선에 금액을 말해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이리 저리 궁리하는척 하다 귓속말로 "내가 잘 무마 시키겠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 제시한 상납 금액의 절반 혹은 3분의 1을 무마 비용으로 챙긴다. 이것이 속칭 ‘마다리 수법’이다. 민영휘의 아버지 민영준은 이런 식으로 큰 돈을 벌었다. 이 집안의 상속자 민영휘가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됐다.

인촌 김성수의 집안은 우리가 아는 대로 전북 고창의 만석꾼 집안이다. 호남 최고 부자 김경중의 양자로 들어가 상속으로 큰 부자가 됐다.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도 일제 강점기에 경성방직을 세워 갑부 반열에 오른다. 민영휘와 김성수 두 사람은 부모 덕에 부자가 된 사람들이다.

최창학은 생소할지 모르겠다. 그는 금광을 개발해 벼락부자가 됐다. 돌잔치에 한 돈짜리 금반지를 해가던 시절이 있었다. 금은 귀하지만 꼭 필요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보편적인 물품이었다. 우리나라는 금이 많이 생산되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운산금광에서 채굴한 금은 5,600만 달러 어치에 달했다. 모든 비용을 제하고 순이익만 무려 1,500만 달러, 이것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가늠이 되시려나? 소련이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아넘긴 금액이 720만 달러다. 미국은 알래스카를 두 번 사고도 남을 금액을 운산금광에서 벌어들였다. 다른 금광에서 캐낸 금덩어리는 계산하기도 힘들다. 여러 광산에서 금덩어리가 아무 조건 없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사냥한 호랑이 위에 앉은 최창학 (최창학 외손녀 양준심 제공)
자신이 사냥한 호랑이 위에 앉은 최창학 (최창학 외손녀 양준심 제공)
"벼락부자, 벼락부자 하지만 근래 조선 사람으로 최창학처럼 벼락부자가 된 사람은 없을 것"
(별건곤, 1932년 11월호)

그는 평북 구성군의 빈촌에서 태어나 20대 초반부터 금맥을 찾아 전국을 떠돌다 29살이던 1923년, 고향 부근인 평북 구성군 조악동에서 금맥을 발견한다. 이후 ‘조선의 황금귀(黃金鬼)’라 불리며 전 조선인의 우상이 되었다. ‘삼성금광’으로 이름 붙여진 최창학의 금광은 평북 운산금광과 더불어 최고의 금광으로 불렸다. 그는 1929년 8월 금광을 미쓰이광업에 130만 원(현재 환산 금액 1,300억 원)에 팔아 재벌이 되었다.

최창학의 성공은 1930년대 조선에 불어닥친 ‘황금광 시대’에 불을 당겼다. 최창학이 금광을 발견한 1923년, 또 한 사람의 벼락부자가 탄생했다. 평북 정주에서 신문사 지국장을 하던 방응모가 평북 삭주군에서 삼지 금맥(손가락 세 마디의 금맥)을 발견했다. 1931년 금광을 매도한 100만 원(1,000억 원)으로 경영난에 허덕이던 조선일보사를 인수했다. 1930년대에는 금광 하나 잘 만나 돈방석에 앉은 사람이 1년에 10여 명씩 쏟아져 나왔다. 조선일보 1932년 11월 29일 자에는 ‘너도나도 금광, 금광 하여 리욕(利欲)에 귀 밝은 량민들이 대소동'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조선일보 1면에 광고한 '조선 광업요론'이라는 책은 금맥을 발견하는 방법이 기술된 책이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다니 당시의 황금광 열풍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최창학은 번 돈으로 1938년 서대문 밖에 으리으리한 집을 지었다. 1,584평의 대지에 연건평 264평 규모로 지하 1층, 지상 2층이다. 지금도 강북삼성병원 내에 건물의 외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다.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藏)이다. 갑신정변 때의 일본 공사 다케조예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이름을 땄다. 최창학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하고 거금을 기부했기 때문에 해방이 되자 불안했다. 당장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때마침 민족의 영웅 김구와 임시정부 일행이 귀국한다고 하니 죽첨장을 임시정부의 사무실과 숙소로 넘겼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11월 23일 이 곳에 짐을 풀었고 이 집의 이름을 경교장으로 바꿨다.

임정 요원 15명은 미군정의 뜻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국민들의 환영식도 없이 장갑차에 짐짝처럼 실려왔다. 당시 상황을 장준하 선생은 자신의 저서 ‘돌베개’에 기록했다. “우리는 5시가 조금 지나 서대문의 경교장으로 들어섰다. 예전대로 동양극장은 그대로였다. 이 경교장은 광산 왕이란 별명이 붙었던 최창학이란 분의 개인 저택이었다. (중략) 우리가 경교장 안에 들어와 장갑차에서 내릴 때까지 임시정부 환국 준비위원회 자체도 전혀 우리의 입국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돌베개, 277페이지)
경교장 앞에서 열린 신탁 반대집회
경교장 앞에서 열린 신탁 반대집회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중앙방송국의 문재안 기자가 이들의 환국을 취재해 방송했고 경교장을 중심으로 서대문에서 광화문까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김구 선생의 담화가 남아 있다. "27년간 꿈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 강산을 다시 밟을 때 나의 흥분되는 정서는 형용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나와 나의 동사는 각각 일개의 시민 자격으로 입국하였습니다. 동포 여러분의 부탁을 맡아 가지고 27년간을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결국 이와 같이 여러분과 대면하게 되니,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에게 벌을 주시지 아니하고 도리어 열렬하게 환영하여 주시니 감격한 눈물을 흐를 뿐입니다. (중략) 여러분은 조금이라도 가림 없이 심부름을 시켜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유익한 일이라면 불 속이나 물 속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임정 요인들이 입국했다는 방송을 듣고 김구 선생을 보기 위해 모인 인파가 동양극장까지 서대문 밖 앞길을 가득 메웠다. 경교장 2층 방 하나에 김구 선생이 쉬셨고, 다른 방에 이시영, 유동열이 묵었고 나머지 임정 요인들은 열 평 남짓한 큰 방에 함께 머물렀다. 입국 후 한 달이 지났고 친탁과 반탁 간에 의견이 극심하게 갈렸다. 이곳은 미군정에 맞선 신탁 반대운동 중심지가 됐다.
이승만과 김구
이승만과 김구
2년 후 1947년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미국과 소련 대표 간에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종래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 한민당은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한 뒤에 점진적으로 통일을 성취하자"고 주장했다.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다. 북한은 남북한 총선거에 대해서 거부하다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로 되자 돌연 ‘전 조선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연석회의(남북 협상)’를 제안한다. 김구는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의가 없지 않으나, 우리는 좌우간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라며 마지막 통일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48년, 4.19혁명이 일어나기 12년 전이다. 4월 19일, 구름처럼 많은 인파가 경교장 뜰을 가득 메웠다. 그들은 북한에 가지 말라고 김구와 김규식을 만류했다. 김구는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 이대로 가면 조국은 분단되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북으로 떠난다. 김구가 북에 보낸 편지에는 당시 심경이 담겨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을 낼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참으로 애절하다. 그러나 남북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김구 장례행렬
김구 장례행렬
1949년 6월 26일 정오를 조금 넘긴 12시 45분 네 발의 총성이 경교장 2층 김구의 집무실에서 울렸다. 백범의 나이 74세, 총을 쏜 사람은 안두희로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거쳐 서북청년회에서 활동한 우익 인물이다. 일요일이었다. 정동 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방안에서 휴식을 취하려는 참이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던 민족의 지도자가 결국 이념의 희생물이 되었다. 차라리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군의 총탄에 맞았으면 억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테러범 안두희의 배후가 가려진 채 단독범행으로 처리되었다. 안두희는 무기징역에서 15년형으로 감형됐고 전쟁 후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를 응징하고자 따라다니던 분이 계신다. 민족정기구현회 권중희 선생이다. 안두희를 여러 번 응징하고 김구 묘소를 강제 참배시켰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정의봉’이라는 방망이를 들고 찾아온 박기서에게 맞아 죽었다. 나라가 응징하지 못한 것을 개인이 했다고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이곳 경교장에서 돌아가신 지 80년이 다가온다. 백범이 죽은 후 11개월이 지나 6.25 전쟁이 일어났다. 이념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를 진전시켰지만, 망국적 이념 논쟁은 여전하다.

이곳에서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고, 조선 초기에는 큰 호랑이(大虎) 김종서 대감도 죽임을 당했다. 임오군란 때는 구식 군인들이 탐관오리를 잡으러 몰려왔다. 나라가 어지러우니 군인들은, 백성들은, 학생들은, 시민들은 이곳 서대문 밖으로 몰려왔다. 농업박물관 앞 김종서 집터에서, 경기감영 터에서, 4.19혁명 기념도서관에서, 경교장에서 안타까운 우리의 역사를 생각한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