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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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는 일부터 천까지써오는 거였다.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다. 학생 사이를 돌며 숙제를 검사하던 선생님이 내 숙제를 보자마자 앞으로 나가라고 했다. 하나 틀린 거에 한 대씩 손바닥을 내밀게 해 회초리로 때리던 선생님이 앞으로 나와 멀뚱거리게 서 있는 내 뺨을 세게 후려쳤다. 뭐라고 말씀은 했으나 기억나지는 않는다. 넘어졌다가 일어서자 다른 뺨도 세게 쳤다. 선생님은 넌 앞으로 숙제해오지 마!”라며 뒤에 가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손들고 서 있는 벌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숙제를 면제 당한 아이가 됐다.

벌 설 때가 돼서야 내 숙제가 잘못된 걸 알았다. 영문도 모른 채 뺨부터 맞은 꼴이었다. 나는 일부터 백을 열 번 쓰고 맨 마지막에 아라비아 숫자 천을 써 숙제를 냈었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날 밤 잠이 막 들었을 때 술에 취해 돌아온 아버지가 깨웠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들과 저녁을 하면서 숙제 얘기를 들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숙제 얘기를 할 때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을 심정이었다. 뜻밖에도 아버지는 느닷없이 크게 웃으면서 잘했다 잘했어. 숙제는 그렇게 하는 거다라고 칭찬했다.

그날 밤이 이슥할 때까지 말씀하신 내용은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며칠 전 어머니께 여쭸다. “그걸 왜 기억 못 하겠냐? 온 동네 소문 다 난 얘기를. 난 그때 이미 얘기를 전해 듣고 가슴 졸이고 있었다. 그런데 네 아버지가 그렇게 호방하게 웃으며 아들 칭찬하는 걸 처음 봤고 의아했다. 술도 못 하시는 분이 그날처럼 취한 건 처음 봤다라고 똑똑하게 기억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날 선생님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고 기억했다. 아버지가 그날 인용한 고사성어가 수주대토(守株待兎)’.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를 기다린다라는 뜻이다.

()나라 사람이 밭을 매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난 토끼가 뛰어가다 밭 가운데에 있는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 광경을 본 농부는 쟁기를 버리고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가 다시 와 부딪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다시는 토끼를 얻을 수 없었고 오히려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되었다. 한비자(韓非子) 오두(五蠹) 편에 나오는 고사다. 한비자는 수주대토의 고사를 빗대어 인의(仁義)와 덕()의 정치를 강조하는 당시 유가들의 어리석은 경험주의를 비판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 발맞추어 그에 걸맞는 이론과 혁신의 사상을 갖출 것을 주장했다. 한비자가 주장한 법은 지금의 성문법과 같은 법률을 포함한 조직을 운용하기 위한 제도나 원칙을 가리킨다.

그날 밤처럼 가끔 아버지는 저 고사성어를 인용했다. 아버지는 정답만 고집하지 말고 해답을 찾아라. 그날 네가 한 숙제는 명백하게 잘못했다. 그러나 내가 칭찬한 것은 원하는 정답은 아니더라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해답을 찾으려는 자세에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오래된 관습이나 제도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새롭게 순응하며 변화해 나가야 한다. 어리석은 짓 하지 마라. 사물을 관찰하고 분별하면서 차원을 높여나가야 한다. 눈치 빠른 놈은 절에 가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라는 속담처럼 말이다라고 설명했다.

부러지지 않는 유연한 마음이 융통성(融通性)이다. 융통성은 그때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 일을 처리하는 재주, 또는 일의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는 재주라고 정의하는 말이다. 융통성이 없으면 한 군데에 머물러 있을 뿐,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 내 착각에서 비롯된 숙제를 아버지가 칭찬해 주는 바람에 지금 기억해도 떨떠름하지만, 융통성은 빡빡하게 돌아가는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유연제다. 손주에게도 일깨워 줘야 할 심성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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