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신혼 초 부모님과 함께 살던 본가에 복면강도 둘이 침입했다. 산에 붙은 베란다를 타고 넘어 들어온 강도가 흉기로 어머니와 만삭의 아내를 위협했다. 강도들은 결혼 패물을 비롯해 어머니가 끼고 있는 반지마저 빼앗아 현관을 통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어머니는 첫애를 잉태한 아내의 배를 쓸어 만지며 다친 데 없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자고 다독이셨다. 한참 만에야 간신히 걸음을 뗀 어머니가 아래층에 계신 아버지께 강도가 든 사실을 알렸다.

아내가 퇴근 후에야 강도가 든 얘기를 저렇게 했다. 부모님이 직장까지 전화해 놀라게 하지 말라고 해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를 뵙자 하신 첫 마디가 부끄럽다였다. 아래층에 있으면서 기척조차 못 느낀 자신의 무력함을 지나치리만큼 크게 자책하셨다. 하시던 회사가 부도난 내력, 그래서 내 결혼 때 당시 유행하던 롤렉스 예물시계를 사주지 못한 데 이르기까지 그동안의 회한을 함께 털어놓으셨다. 몇 번이나 만류했으나 저녁도 거르며 부끄럽다라는 말만 반복하셨다. “동물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끄러워해야 사람이다. 부끄러워하는 건 양심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더 나은 길을 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다음날 출근 인사를 드릴 때 아버지 책상 위 노트에 적힌 글귀를 우연히 봤다. ‘무괴아심(無愧我心).’ 수첩에 적어와 찾아본 고사성어다. 중국 명()나라 정치가이자 시인인 유기(劉基)가 한 말이다. 원문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다만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구할 뿐이다[豈能盡如人意 但求無愧我心]”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탓하기 전에 내 스스로 엄격하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회한의 밤을 보내며 쓰셨을 고사성어는 그후 내가 살아가며 남을 탓하기 전에 나를 먼저 돌아보고 살펴보는 계기가 됐다. 서둘러 손주에게도 깨우쳐줘야 할 인성이다. 부끄러움은 내 기준에 비추어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살피는 마음이다. 잘못을 고치고 부족함을 메워 성장하려는 노력은 부끄러움에서 나온다. 창피함이나 수치심엔 그런 발전의 힘이 없다.

아버지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그날을 떠올리며 부끄럽다고 하셨다. 당신의 며느리와 눈을 마주치기조차 어려워하셨다.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될까 속을 끓여 당뇨병마저 얻은 아버지는 아내가 무사히 출산하자 내 머리를 두들기며 연신 부끄럽다고맙다를 번갈아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그래서 더 지극했다. 그러면서 사업이 잘 되면 강도당한 패물은 물론 결혼할 때 해주지 못한 롤렉스 시계도 사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십수 년 지나 베트남 출장길에 호찌민 빈탄 시장을 관광하며 시계 골목을 돌아봤다. 불현듯 아버지가 부끄럽다는 말씀이 생각나 금장 롤렉스 시계 남녀 한 쌍을 한국 돈 7만 원에 샀다. 귀국한 이튿날 들른 시계수리점 주인이 배터리를 갈아 넣어주며 최신형이네요. 비쌀 텐데요라고 했다. 아버지께 시계를 드렸다. ‘베트남 짝퉁 시장에서 싸길래 한 개 더 사 왔습니다. 완전 가짜니까 맘 편하게 차고 다니세요. 그리고 이젠 롤렉스 시계 미련은 버리세요라고 완곡하게 말씀드렸다.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그 시계를 돌려주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애비가 가짜라고 했지만, 내가 안 받을 거 같으니까 그렇게 말한 거여. 애비 성격 보면 몰라? 틀림없는 진짜일 거야라며 차지 않으셨다고 했다. 미련을 버리고 잊으라고 시계를 사드렸지만, 아버지는 끝내 부끄러움을 안고 돌아가셨다. 짝퉁 시계는 배터리만 넣어주면 신기하게 지금도 잘 간다. 진짜라고 확신하신 아버지 효과가 있어 그런지 고장 나지 않고 잘 가는 이 시계를 20년 가까이 부끄러움을 새기며 내가 차고 다닌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석명하게 밝혀드릴 수가 없어 이 부끄러움은 내가 평생 안고 가야 한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