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마중물과 마중불, 하청호
[한시공방(漢詩工房)] 마중물과 마중불, 하청호
[원시]
마중물과 마중불

하청호

외갓집 낡은 펌프는
마중물을 넣어야 물이 나온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땅 속 깊은 곳
물을 이끌어 올려주는 거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도
마중불이 있어야 한다.
한 개비 성냥불이 마중불이 되어
나무 속 단단히 쟁여져 있는
불을 지피는 거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이끌어 올려주는 마중물이 되고 싶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지펴주는 마중불이 되고 싶다.

[태헌의 한역]
引水與引火(인수여인화)

外家陳舊抽水機(외가진구추수기)
引水注入乃出水(인수주입내출수)
一瓢引水在機中(일표인수재기중)
可導地下深處水(가도지하심처수)
廚下竈口爨薪時(주하조구찬신시)
應當先有一引火(응당선유일인화)
一根火柴在竈中(일근화시재조중)
能燃薪裏蘊藏火(능연신리온장화)
爲善導誰心(위선도수심)
吾願作引水(오원작인수)
爲善溫誰心(위선온수심)
吾願作引火(오원작인화)

[주석]
· 引水(인수) : 마중물. / 與(여) : ~와, ~과. ‘and’에 해당하는 연사(連詞)이다. / 引火(인화) : 마중불. ‘마중물’에서 착안하여 시인이 만들어낸 자가어(自家語)로 보인다.
· 外家(외가) : 외가(外家). / 陳舊(진구) : 낡다, 오래 되다. / 抽水機(추수기) : 양수기(揚水機)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는 중국어이지만, 우리가 양수기로 부르는 기계와 구별하기 위하여 물 펌프의 뜻으로 역자가 골라 본 말이다. 우리가 물 펌프로 부르는 것을 일컬을 때 중국인들이 ‘抽水機’라는 표현을 가끔 사용하기도 한다.
· 注入(주입) : (물 따위를) 집어넣다, 넣다. / 乃(내) : 이에, 곧.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出水(출수) : 물을 나오게 하다, 물이 나오다.
· 一瓢(일표) : 한 표주박, 한 바가지. / 在機中(재기중) : 기계[펌프] 안에 있다.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可導(가도) : ~을 이끌 수 있다. ~을 끌어올 수 있다. / 地下深處水(지하심처수) : 땅 속 깊은 곳의 물.
· 廚下(주하) : 부엌.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竈口(조구) : 아궁이. / 爨薪(찬신) : 땔감을 때다, 불을 때다. / 時(시) : ~할 때에.
· 應當(응당) : 응당, ~을 해야 한다. / 先(선) : 먼저.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有(선유) : ~이 있다. ~을 있게 하다. / 一(일) : 하나, 하나의.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引火(인화) : 원시의 ‘마중불’을 역자가 임의로 한역한 표현이다.
· 一根火柴(일근화시) : 한 개비의 성냥, 한 개비의 성냥불. ‘根’은 개비에 해당하는 양사(量詞)이다. / 在竈中(재조중) : 아궁이 안에 있다.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能燃(능연) : <불을> 지필 수 있다. / 薪裏蘊藏火(신리온장화) : 땔감 속에 쌓아 둔 불, 땔감 속에 쟁여진 불. ‘蘊藏’은 쌓아 두거나 깊이 간직한다는 뜻이다.
· 爲(위) : ~을 위하여. / 善導(선도) : ~을 잘 이끌다. / 誰心(수심) : 누군가의 마음.
· 吾願(오원) : 나는 ~을 원한다, 나는 ~을 하고 싶다. / 作(작) : ~이 되다.
· 善溫(선온) : ~을 잘 덥혀주다, ~을 잘 따뜻하게 해주다.

[한역의 직역]
마중물과 마중불

외갓집 낡은 펌프는
마중물을 넣어야 물이 나온다.
한 바가지 마중물이 펌프 안에 있으면
땅 속 깊은 곳의 물 이끌 수 있다.
부엌 아궁이에 땔감을 땔 때도
응당 먼저 마중불이 있어야 한다.
한 개비 성냥불이 아궁이 안에 있으면
땔감 속에 쟁여진 불 지필 수 있다.
누군가의 마음 잘 이끌어 주기 위해
나는 마중물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마음 잘 지펴주기 위해
나는 마중불이 되고 싶다.

[한역노트]
시인은 외갓집에서 보게 된 펌프를 떠올리며 이 시의 실마리가 된 시상(詩想)을, 마치 물을 긷듯이 길어 올렸을 것이다. 여기에, 역시 외갓집에서 보았을 아궁이에 대한 기억이 더해지면서 이 시의 얼개가 완성되었을 것이다. 물과 불이 상극임에도, 둘 다 마중할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으로 인하여, 이 시에서는 마침내 동질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런데 역자는 펌프라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돌아가신 아버님부터 생각이 난다.

역자의 아버님께서는 기계라는 기계는 거의 다 다룰 줄 알고 또 고칠 줄 아셨는데, 거기에 더해 100호(戶)가 넘는 역자의 고향 마을 펌프 가운데 얼추 절반 이상은 아버님이 직접 파시거나 감독을 한 것이었다. 김해공병학교 출신의 기술자(?)라서 그러신 건지는 몰라도, 좌우지간 마을 사람들은 어떤 기계가 고장이 나면, 으레 아버님을 찾아오거나 부르는 것이 거의 공식이 되다시피 하였다.

한번은 아버님께서 들에서 소를 메워 밭을 갈고 계셨는데, 마을의 어느 집 아주머니께서(9할 이상이 일가인 집성촌이다 보니 당연히 친척이다.) 우리 밭으로 오셔서,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시는데 펌프가 고장이 나 애로가 많으니 좀 고쳐달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날이 어지간히도 따뜻했던 그 어느 봄날에 밭을 갈던 소를 밭 한 가운데에 그대로 세워두고, 소를 어떻게 하라는 말씀도 없이, 득달같이 역자가 들에 갈 때 타고 갔던 그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가셔서 펌프를 고쳐주고는, 대략 한 시간이 넘어 들로 돌아오셨다. 그날 어머님의 역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이따금 들려오고는 했던 기차 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두 분께서는 어쩌면 저 세상에서도 가끔 그 펌프 사건 얘기를 하며 다투고 계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역자는, 널리 알려진 ‘마중물’이라는 말과 함께 시인이 거의 독창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마중불’이라는 말이 정말이지 더없이 예쁘게만 여겨진다. 어디 예쁜 것에만 그칠 뿐이랴! 아마 이처럼 반갑고 고마운 말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듯하다. 그런데 시인은 누군가에게 그런 마중물과 마중불이 되어주고 싶다고 하였다. ‘마중물’과 ‘마중불’이라는 말 자체만으로도 이미 온기가 느껴지는데, 다시 시인의 원망(願望)과 배려(配慮)까지 더해졌으니, 이보다 더한 따스함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을 듯하다.

오늘날에는 시골을 가더라도 펌프와 아궁이를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불과 2~3십여 년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바뀌기도 하는 것을 보면, 한 2~3백년쯤 후에는 도대체 어떻게 변해있을지 생각만 해도 그저 아찔하기만 하다. 설혹 그렇다고는 하여도 그 시대에도, 펌프로 물을 긷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과 비슷하게 누군가에게나 어딘가에서는 마중물과 마중불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계층이든, 세상에는 마중물이 필요한 데가 정말로 많다. 그런데도 한 바가지에 담길 마중물이 필요한 데로 가지 못한다면, 그 마중물은 더 이상 마중물이 아닐 것이다. 마중물이 아예 없다거나, 마중물이 제대로 마중물 구실을 못하는 세상은, 이미 망가진 세상일 것이다.

역자 생각에는, 소시민 100사람에게 100만원씩 나누어주는 것보다는, 뛰어난 인재 한 사람에게 1억을 주고, 100사람에게 제공할 일자리를 만들도록 하는 게 바로 마중물의 개념이 아닐까 싶다. 펌프는 한 바가지 마중물로 그 백 배, 천 배가 넘는 물을 이끌어 올 수 있다. 그러므로 역자는 훌륭한 지도자 한 사람이 100사람을 먹고 살게 해줄 수 있지만, 멍청한 지도자 한 사람은 100사람을 굶어죽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마중물이 되어줄 지도자가 얼마나 소중하고 기다려지는 존재겠는가! 천박한 진영 논리에 갇혀, 내 편이면 무조건 옳고 훌륭하다고 여기는 저열한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는 한, 그 사회는 마중물이 마중물로 기능하지 못하여, 더 이상 희망이라는 것이 없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중물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선 목이 마르다고 해서 그 마중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농부는 굶어죽어도 종자는 머리에 베고 죽는다고 하였다. 종자가 없다면 그 어떤 농사가 이루어지겠는가! 서양 동화에 나오는 성냥팔이 소녀가 더없이 가련하고 또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그 소녀처럼 성냥만 불 피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 개비의 성냥이 좋은 일을 할 큰 불을 만들어낼 수 있을 때에, 그 성냥은 마중불로서의 가치가 있다.

다시 말해 마중물과 마중불은 보다 더 큰 물과 불을 마중하기 위한 것이지, 그것을 마시거나 쬐기 위한 것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이 바로 그런 우를 범하고, 역자 역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그저 두려울 따름이다. 지금 쓰고 있는 돈과 들이고 있는 시간이 미래를 위한 마중물이나 마중불이 되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금 쪽과도 같은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 뿐이리라.

역자는 3연 13행으로 된 원시를, 칠언과 오언이 섞인 12구의 고시(古詩)로 재구성하였는데, 원시의 1연과 2연은 각각 칠언 4구로, 3연은 오언 4구로 한역하였다. 3연의 경우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주어 “나”를 짝수 구 첫머리에 위치하도록 하는 등, 문장의 구성을 제법 큰 폭으로 조정하였다. 그리고 이 한역시는 압운이 매우 독특하다는 사실에 주의를 요한다. 역자가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압운법인데, 영시(英詩)에서 종종 구사되는 라임(rhyme)과 같은 기법으로 이해하면 무방할 듯하다. 짝수 구마다 압운한 압운자 ‘수(水)’, ‘수(水)’, ‘화(火)’, ‘화(火)’, ‘수(水)’, ‘화(火)’는 영시의 라임으로 따지면 “aabbab”의 형식이 되는 셈이다.

2022. 9. 13.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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