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되살아나는 추억 한토막이 있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실없이 미소짓게 하는 사연이지요. “36년이 넘은 사건인데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만방에 털어 놓을까 합니다.
그해 겨울의 황당 사건, 이젠 말할 수 있다.
아찔했던 당시로 시간여행을 떠나 보겠습니다. 보따리를 풀기에 앞서 당시 사건(?) 현장에 함께 했던 이모, 김모 병장을 비롯, 부산에서 사업 잘 하고 있는 배모 일병, 그리고 축석검문소 헌병, 송우리 대포집 주인장 등 등장인물들에 대한 신변안전이 심히 우려되나 36년을 거슬러 소급 처벌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란 전제 하에 1982년 어느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혹시 DSC(Defense Security Command)라고 들어 보셨는지요? 국군보안사령부(現,기무사)를 뜻합니다. 소생은 당시 상병 계급을 달고 경기도 포천에 소재한 DSC 예하부대 CP병으로 근무하고 있었지요. CP병을 속된 말로 ‘따까리’라고도 하고 당번병으로 불려집니다.. 역할이라는게 대개 그렇습니다. 부대장실 찾아온 손님들께 차 끓여 올리고, 스캐줄 챙기고,,, 부대 내 행정, 운용과장 등이 “부대장님 오늘 심기가 어떠한가”라고 물어오면 그때그때 답도 드려야 합니다.
부대 내에서 사병들에게 가장 엄한 상관이 행정과장이지요.그런 그도 제게 부대장님 심기를 물어올 때면 속삭이듯 합니다. “오늘은 영 아닙니다”라고 전해 주면 이 분들은 화급을 요하는 보고가 아닌 이상, 절대 부대장실 문턱을 넘지 않으려 합니다. 반면 “기분이 썩 좋아 보이십니다”라고 하면 그간 덮어 두었던 시시콜콜한 보고까지 내리 1시간은 보통입니다.

그러다보니 부대장 심기를 제대로 체크하기 위해 나름 노력도 해야 합니다. 부대장이 부대 내에 근무 중일 때는 CP병인 내가, 퇴근하여 관사에 계실 때는 관사 당번병이, 이동 시에는 1호차 운전병이 있어 하루 기상예보를 들여다 보듯 부대장의 표정은 시시각각 체크되어 당번병 중 최고참인 제게 보고되어져 통합관리(?) 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아주 가끔 이 특권을 무리하게 남용한 적도 있었음을 이제서야 고백합니다. 한번은 행정과장으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관사 당번병이 부대장님 심기가 ‘잔뜩 먹구름’이니 참고하라고 전해 왔습니다. 이날도 어김없이 행정과장은 제게 인터폰으로 부대장님 심기를 물어왔습니다.
“아주 좋아 보이십니다”
조금 뒤 행정과장은 왼쪽 겨드랑이에 잔뜩 결재서류를 끼고서 만면에 미소 띤 얼굴로 부대장실을 노크했습니다.
부대장실 내에서 보고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우당탕 쿵쾅’ 소리와 함께 천둥벼락 소리가 들렸고 곧 벌겋게 달아오른, 설명하기 힘든 표정으로 문을 밀고 나오는 행정과장의 얼굴을 나는 보았습니다.

고등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덩달아 뛴다고 고참 병장들도 행정과장, 운용과장의 심기를 내게 물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괜히 시건방끼가 도지기 시작했지요. 이를테면‘부대장도, 운용과장도, 행정과장도 모두 내 손 안에 있다’뭐 이런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해 겨울의 황당 사건, 이젠 말할 수 있다.
연말 어느날, 1호차 운전병이 퇴근하는 부대장님을 관사에 모셔다 드리고 부대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몇몇 고참 병장과 작당하여 부대 내로 들어오는 1호차를 돌려 세웠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운전병을 계급으로 누른뒤 그 차를 인근 송우리 방향으로 향하도록 했지요. 송우리 어느 대포집에 들어가 술판을 벌였습니다. 인근 검문소 근무자인 현병도 1명 이곳에 합류시켰으니 이 정도면 모조리 남한산성 유람(?)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최전방 상황에 따라 한밤 중에도 불시에 1호차를 찾을 수 있는데 다행히 그날 밤은 조용하게 넘어갔고 우리는 무사히 부대로 들어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음날 기상시간을 맞았습니다.
6시에 기상은 했으나 어젯밤 무리하게 퍼마신 탓에 비몽사몽 침상에 기대어 있으려니 쫄병들께서 청소에 방해된다며 어디 다른 곳에 가서 누워 있다가 청소 끝나면 오라더군요. 그래서 런닝셔츠에 팬티바람으로 제 근무실이기도한 2층 CP 당번실로 올라 갔지만 당번실에 쪼그려 있기가 불편했습니다. 부대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지요. 부대장실 안에는 욕실이 딸려 있는 조그만 침대 방이 있습니다.
“그래 까짓거 이 방에 잠깐 누웠다가 청소 다 끝나면 내려가지 뭐.” 그러나 ‘잠깐’은 ‘긴 잠’으로 이어졌습니다.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습니다. 부시시한 상태로 눈을 비비며 올려다 보았지요. 앗! 부대장님 얼굴이었습니다. 차라리 그대로 영원히 눈을 감고 싶었습니다. 시간은 09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전날 밤 일탈은 쏙 빼놓고, 기상해서부터 이곳에 누워 있게 된 경위를 소상히 말씀드렸지요. 어설픈 변명이라는 것쯤은 훤히 아셨을텐데도 빨리 일어나 내무반으로 내려가 복장 갖춰 입고 당번실로 올라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을 확대시키고 싶지 않으니 행정과장에게는 아무 얘기하지 말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아! 이게 웬일입니까? 머릿 속엔 온통 ‘내 인생 이렇게 군대에서 쫑을 치는구나’하며 자책하고 있는데 부대장님께서는 둘만의 비밀이라며 입단속을 시키며 통 크게 ‘사면’을 한 겁니다.

허겁지겁 내무반으로 들어가 복장을 단정히 하여 당번실에 올라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날을 보냈습니다. 그날 일과 후에 내무반에서 들은 바로는 부대장님 출근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행방을 알 수 없는 소생을 쉬쉬하며 찾느라 다들 진땀을 흘렸다고 들었습니다. 더불어 거사(?)에 동참했던 고참들은 얼굴들이 하얗게 되어 좌불안석에 십년감수했다고 했습니다. 이 사건에 연루됐던 고참, 쫄병, 그리고 너그러이 용서해주신 당시 부대장님이 몹시도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