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첫사랑, 서정춘

첫사랑



서정춘



가난뱅이 딸집 순금이 있었다


가난뱅이 말집 춘봉이 있었다



순금이 이빨로 깨뜨려 준 눈깔사탕


춘봉이 빨아먹고 자지러지게 좋았다



여기, 간신히 늙어버린 춘봉이 입안에


순금이 이름 아직 고여 있다



[태헌의 한역]


初戀(초련)



多女貧家有順今(다녀빈가유순금)


役馬貧家有春峰(역마빈가유춘봉)


順今用齒分糖菓(순금용치분당과)


春峰舐食喜滿胸(춘봉지식희만흉)


方老春峰口脣內(방로춘봉구순내)


順今姓名猶龍鍾(순금성명유용종)



[주석]


* 初戀(초련) : 첫사랑.


多女(다녀) : 딸이 많다. / 貧家(빈가) : 가난한 집. / 有(유) : ~이 있다. / 順今(순금) : 원시의 ‘순금’을 역자가 임의로 한자로 표기해본 이름이다.


役馬(역마) : 말을 부리다. 말을 이용해 짐을 나르는 등의 일을 하면서 산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 春峰(춘봉) : 원시의 ‘춘봉’을 역자가 임의로 한자로 표기해본 이름이다.


用齒(용치) : 이빨을 써서, 이빨로. / 分(분) : ~을 나누다, 쪼개다. / 糖菓(당과) : 보통 사탕과 과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사탕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舐食(지식) : 핥아먹다, 빨아먹다. / 喜滿胸(희만흉) : 환희가 가슴에 가득하다. “자지러지게 좋았다”를 의역한 표현이다.


方老(방로) : 바야흐로 늙다, 이제 늙다. 원시의 ‘간신히 늙다’를 역자가 임의로 한역한 표현이다. / 口脣(구순) : 보통 입과 입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입’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 內(내) : ~의 안, 안쪽에.


姓名(성명) : 성명, 이름. / 猶(유) : 오히려, 여전히, 아직. / 龍鍾(용종) : 흥건하다. 축축하게 젖은 모양.



[한역의 직역]


첫사랑



가난한 딸부자 집에 순금이 있었고


말 부리는 가난한 집에 춘봉이 있었다


순금이가 이빨로 사탕 쪼개자


춘봉이 빨아먹고 환희가 가슴에 가득


이제 늙어버린 춘봉이 입안에


순금이 이름 아직도 흥건하다



[한역 노트]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거리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바쁜 일상에 떠밀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산다 해도 누구에게나 추억의 자리 거기쯤에는 첫사랑이 있고 조바심이 있을 것이다. 시인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쉬이 잊히지 않는 첫사랑은 어쩌면 아련한 추억 속에서 피었다가 지고 또 다시 피어나는 무지개는 아닌지 모르겠다.


시인이 이 시를 통해 노래한 첫사랑은 가난했던 시절 소년과 소녀의 풋사랑이다. 나이라고 해봐야 겨우 열 살을 살짝 넘긴 정도였을 테니 당사자들은 그게 사랑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까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뒤돌아보니 그게 첫사랑이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가난했지만 근심도 걱정도 없었을 그 순백(純白)의 시절에 소년과 소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느꼈을 그 ‘사랑’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지금에 다시 느껴볼 수 있을까? 눈깔사탕조차 귀한 먹거리였던 그 시절에 사탕 하나를 쪼개 나누어 먹는 것보다 더한 애틋함이 또 어디에 있을까?


자전적(自傳的)인 얘기로 보이는 이 시는 시인이 50대에 들어선 이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간신히 늙어버린”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뉘앙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춘봉’은 시인의 아명(兒名)이었거나 집에서만 부르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순금’이라는 이름은 실명(實名)으로 보이지만 또 실명이 아니라 해도 이 시를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춘봉과 순금의 풋사랑은 대개의 첫사랑이 그러했듯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숱한 첫사랑의 시 가운데 역자가 유난히 이 시를 좋아하는 까닭은 역자에게 비슷한 경험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탕 두 개도 분수 밖의 욕심이 되었던 그 시절의 애잔함이 시인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남루한 가난을 하늘처럼 이고 살았던 그 시절에 변변한 첫사랑도 없었던 역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애틋하게 따스함의 꽃을 피워 추억의 들을 예쁘게 가꾸었을 시인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코로나만 아니라면 술 한 병 사들고 시인을 찾아뵙고서 앉은뱅이 주안상 하나 사이에 두고, 시에서 못다 한 추억들을 들으며 이 허허로운 겨울밤을 지새워보고 싶다. 이따금 눈이 창밖을 서성이기도 할 겨울밤 호사(好事)로 이보다 더한 것이 또 있으랴!


그 옛날 순금씨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실까? 역자의 큰 누님처럼 손자 손녀 뒤치다꺼리하느라 허리 쑤시고 무릎 쑤신다고 할 단계는 이미 지나셨을 듯하니, 학과 같은 머리를 하고 겨울날 따스한 햇살 쐰다는 핑계로 옛 추억을 떠올려 보고자 문밖을 나서기도 하시는 걸까? 이 땅에 살아 계시다면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빈다. 눈깔사탕처럼 달달한 맛은 고사하고 소태처럼 쓴 맛만 넘쳐나는 세상이라 하여도 세상은 여전히 추억이 있어 아름다운 곳이 되리라.


역자는 이 시를 한역한 후에 한시로는 원시의 맛을 다 살리지 못하는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생리가 다른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역자의 천학(淺學)과 비재(菲才) 때문일 공산이 큰 듯하여 역자는 혼자서도 얼굴을 붉혔다. 학인(學人)의 길은 멀고 험한 것임을 오늘도 통감한다. 역자는 3연 6행으로 된 원시를 6구로 이루어진 칠언고시로 한역하였다. 한역시는 짝수 구마다 압운하였으며 그 압운자는 ‘峰(봉)’·‘胸(흉)’·‘鍾(종)’이다.


2021. 1. 5.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