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흘째 기승을 부렸으면 동장군도 지쳐버릴만 한데, 여전히 고집불통이다.
춥다고 산행을 포기할 순 없는 노릇, 따스한 이불 속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강원산간 심설산행을 머릿 속에 떠올렸다. 즉효다.

05:30분, 도둑고양이 마냥 슬그머니 안방을 빠져나와
현관 앞에 미리 챙겨놓은 옷가지와 배낭을 입고 메고 집문을 나섰다.
밤사이 매서운 바람은 잦아들었으나 뼈 속까지 파고드는 한기는
절로 종종걸음을 치게 한다.
새벽 어스름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각, 완전무장?한 산객들 틈에 섞여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대기 중인 산방 버스에 올랐다. 마치 전장으로 향하는 전사처럼…

오늘 산행 메뉴는 강원도 평창 보래봉과 회령봉이다.
한강기맥에 속한 보래봉(1,324m)과 회령봉(1,309m)은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보래봉을 품고 있는 평창군 봉평은 해발 600~800m의 고냉지대이다.
지대가 높고 추운데다 적설량 또한 넘쳐나 심설산행을 즐기기엔 그만이다.
봉평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으로도 유명하다.
여름에는 천지가 메밀꽃이고, 겨울에는 산야가 온통 눈꽃 천지다.

보래봉은 운두령(1,089m)을 들머리로 하여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코스는 생태 보존을 위해서 현재 입산통제 중이다.
그런 이유로 보래령터널을 들머리로 하여 보래봉, 회령봉을 올랐다가
세계정교 방향으로 하산하는 것으로 코스를 정했다.
얼추 4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코스이나 심설산행인 경우엔 어림없다.
적설량에 따라 두세배 더 걸릴 수도 있고, 러셀 여부에 따라 산행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
설산 마니아들의 입을 빌리면 ‘눈이 무릎 아래까지 쌓였을 때 평소보다 두배,
허벅지까지 빠질 때는 세배 이상 체력이 소진된다’고 한다.

난방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놓아 차내 공기가 후텁지근했다.
차창엔 뿌옇게 성에가 내려앉아 바깥 풍경을 차단했다.
눈꺼풀이 잠길 수밖에. 재킷을 벗어 무릎에 올려놓은 채 단잠에 빠져 들었다.

순간! 차체가 요동치듯 심하게 일렁거렸다.
눈을 떴다. 단말마도 들렸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소리…

횡성휴게소를 20여 킬로미터 앞둔 영동고속도로 상에서 하마터면 초대형 교통사고로
이어질 뻔 했던 아찔한 상황을, 휴게소에 도착해 앞좌석에 앉았던
산객 몇몇으로부터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탄 40인승 버스를 추월하려 끼어들던 승용차가 버스 바로 앞에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2차선 쪽으로 튕겨져 나오는 찰나, 2차선을 달리던 버스기사는
급브레이크 대신, 반사적으로 핸들을 1차선으로 틀어 간발의 차이로 충돌을 면했던 것.

모두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시 차에 오른 산객들은 앉기 무섭게 안전벨트부터 채운다.
이런게 바로 학습효과인가?

평창과 홍천을 잇는 보래령터널 입구에 버스는 멈춰섰다.
산간 공기는 차가우나 바람이 없어 푹한 느낌이다.
스패츠와 아이젠을 착장하고, 스틱 길이를 조절하고, 고글을 착용했다.
생각 외로 적설량이 많다. 계획대로 산행이 될까, 염려될 정도다.

오른쪽 임도로 올라섰다. 눈 속에 철제 차단막이 묻혀 있다.
등산지도 상에는 철제 차단막을 넘어 진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발자국은 좌측으로 우회하여 나 있다.
눈 속에 묻힌 등로를 찾아 러셀하며 오르기란 고도의 설산 노하우와
엄청난 체력이 요구된다. 괜히 까불다간 낭패 볼 수도 있다.
이럴땐 얌전하게 드문드문 찍힌 발자국을 따르는게 상책이다.

임도가 끝난 건지, 어디서부터 산이 시작되는지,
산세로 보아 계곡에 들어선 것도 같은데…
산 전체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어 지형도 계곡도 분간이 안된다.
뭉쳐지질 않고 모래처럼 부스러지는 건설(乾雪)이라
한걸음 내디디면 반걸음 미끄러지고…
그렇게 눈과 씨름해가며 야금야금 능선에 올라섰다. 보래령이다.

보래령(1,090m)은 한때 평창 봉평에서 홍천 내면을 들고나는 고갯마루였다.
그러다가 인근 운두령에 찻길이 생기면서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걸음을 멈춰 배낭을 내렸다. 보온통에 담아온 생강차로 목젖을 적셨다.
매콤한 생강 내음이 입안 가득 따습게 번진다.
고갤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햇살에 노출된 설산은 백옥처럼 눈부셨다.
나뭇가지 사이로 고랭지 채소밭 고랑도 눈에 들어왔다.

코발트빛 하늘과 눈부신 설산에 푹 빠져 멍때리다 보니
땀범벅이던 몸뚱어리가 식어 으슬으슬해 왔다.
흘린 땀이 식어 체온을 빼앗고 있기 때문이다.
몸 자체 발열 보다 손실되는 열이 많을 때 체온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손에 쥐고 있던 핫팩을 목덜미에 갖다 대고 머플러로 고정했다.
목덜미의 뜨끈함이 등줄기로 전이되는 느낌이다. 한기가 좀 가신다.
체온 보존을 위해 마냥 쉴 수만은 없다.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보래봉으로 이어진 능선으로 올라 붙었다.
발자국으로 보아 아마도 대여섯명 정도가 앞서 걸어간 듯 싶다.
그들이 디뎌 놓은 발자국 구덩이에 발을 높이 들어 조심조심
넣었다 뺐다를 반복 해야만 했다.
스텝이 꼬여 발자국 구덩이가 무너져 내리면 후미 산객들은
모래더미를 걸어 오르는 것처럼 줄줄 미끄러지져 곱으로 힘이 든다.

그렇게 기진맥진, 보래봉(1,324m)에 닿았다.
보래봉은 이웃해 있는 계방산의 유명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 한강기맥을 종주하는 산객들로 인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번갈아가며 힘겹게 러셀을 하던 선행자들도 더이상 나아가지 않고
보래봉에 주저앉아 있었다. ‘더는 못 가겠다’고 했다.
안부 너머 회령봉은 손에 잡힐 듯 만만해 보였으나 러셀을 하며 진행한다는 건
체력적으로나 시간상으로 도저히 무리라고들 했다.
욕심을 버리는 마음도 중요하다. 결론은, 유턴. 왔던 길 되돌아 가기로 했다.

일단은 허기진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하산 체력을 비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산봉우리는 가뜩이나 좁은데다 쌓인 눈이 워낙 많아 눈을 다지기엔 무리다.
여럿이 달려들어 산비탈로 눈을 쳐내 겨우 둘러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뜨끈한 어묵 국물, 이어진 산중 일배…
적당한 긴장감은 녹아 내리고 설산의 달뜬 마음에
얼굴은 불콰해지고 삭신은 노곤해져 온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 너나없이 동심으로 돌아간듯 마냥 신났다.
다 큰? 어른들이 엎어지고 자빠지며 연신 눈밭을 뒹군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확 날려 버리는, 심설산행의 실속 보너스다.

2013. 01. 06 평창 보래봉 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