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가지 않으면, 10년을 기다려야 해요.” 5월의 어느 날, 지인에게 전화를 받고 6월 독일의 뮌스터를 향해 짐을 꾸려 떠났다. 베니스 비엔날레(Venezia Biennale), 카셀 도쿠멘타(Kassel Documenta)와 함께 유럽 3대 미술행사로 꼽히는 독일의 공공미술 행사, 10년에 한 번 열리는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Skulptur Projekte Münster) 보기 위해 말이다. 그리고, 6월 나는 뮌스터라는 낯선 도시 땅 위에 서 있었다.
독일의 작은 도시 뮌스터, 10년에 한번 세상의 중심이 되다.
1987년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참여작가 다니엘 뷔랭의 ‘4번째 문’ @photographed by Hani Oh
독일의 작은 도시 뮌스터, 10년에 한번 세상의 중심이 되다.
뮌스터 대성당(Münster Cathedral) @photographed by Hani Oh
독일의 작은 도시 뮌스터, 10년에 한번 세상의 중심이 되다.
뮌스터 시가지를 원형으로 감싸는 나무길 @photographed by Hani Oh

인구밀도가 낮고, 자연환경이 우수한 전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인구 30만명의 뮌스터는 한국으로 치면 전라북도 익산시, 경상남도 양산시에 해당하는 인구 규모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2004년 뮌스터는 인구 20만에서 75만 사이의 전세계 도시 중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는 LivCom-Award 상을 수상한다. 뮌스터의 지리적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도시를 원형으로 둘러싸는 4.5킬로미터의 나무길일 것이다. 도시의 벽을 허물고 나무길을 조성하여 자전거와 보행자들을 위한 길을 만들었다. 독일에서 면적이 큰 도시 중 한 곳인 뮌스터는 인구 밀도가 낮다. 도시를 둘러싼 나무를 비롯하여 녹지가 많으며 도시 가까운 곳에 호수가 있다.
독일의 작은 도시 뮌스터, 10년에 한번 세상의 중심이 되다.
뮌스터 도심 @photographed by Hani Oh

전쟁의 폐허 속에서 새롭게 다시 지어진 도시

뮌스터는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에 걸쳐 독일에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을 끝내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곳으로 유명하다. 1940년대 뮌스터의 주교는 나치 정부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뮌스터는 제 2차 세계 대전 때 군사 요새가 되었고, 1944년 10월 25일 폭격을 당하게 된다. 연합군의 공군에 의한 폭격으로 구시가지의 91%, 전체 도시의 63%가 파괴되다. 철저하게 폐허가 되어버린 셈이다. 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에 구 시가지는 전쟁 이전의 모습으로 재건설되었다. 폭탄은 집들은 모두 부서졌지만, 하수도 시스템은 그대로였고, 그래서 새로운 도시는 옛날 레이아웃에 기초하여 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이 도시의 아픔이고, 그 아픔을 딛고 새로 일어났다는 자긍심이 주민들에게 있다. 뮌스터 관광청에서 나온 가이드 아네트와 함께 뮌스터 시내를 걸으면서 꽃내음이 묻어나는 자연의 싱그러운 공기와 새로 지어졌으나 옛 모습을 유지하려고 지은 낮은 건물들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안정적인 물가, 시민 5명 중 1명은 학생

뮌스터에는 약 55,500명이 공식적으로 학생으로 등록되어있다. 반올림을 하면 전체 도시 거주자 다섯 명 중 한 명이 학생인 셈이다. 뮌스터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가 있다. 793년에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는 뮌스터랜드에 전도사를 보냈고, 797년에 뮌스터에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것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인 Gymnasium Paulinum로 우리로 치면 중학교에 해당된다. 초중등 교육기관 합쳐 총 92개의 학교가 존재한다. 그 중 가장 큰 규모를 가진 것은 약 3만 6천명의 학생이 등록되어 있는 뮌스터 대학이다. 1780년에 베스트팔렌 빌헬름 뮌스터 대학교(“Westphalian Wilhelms-University”, WWU) 을 시초로 하는 종합 대학으로 게르하르트 요하네스 파울 도마크(Gerhard Johannes Paul Domagk:1939, 의학·생리학), 요하네스 게오르크 베드노르츠(Johannes Georg Bednorz:1987, 물리)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독일에서 뮌스터는 부촌으로 불리우는 도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다른 유명대학들이 있는 뮌헨, 하이델베르크, 베를린과 비교했을 때 월세를 포함한 소비자 물가가 23%, 13%, 7% 저렴하다. 서울과 비교해 보았을때 26% 저렴하다. 특히 식료품가격만 비교했을 때는 서울보다 43% 저렴하다. 먹고, 거주하면서 학업에 정진하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자전거, 도시의 상징이자 도시를 보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

대중교통은 특히 자전거를 주요하게 이용한다. 독일에서 유럽에서 자전거 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로 자전거를 이용하는 시민들이 많다. 분주한 도시와는 다소 느린 삶의 속도를 제안하는 도시. 도심의 크기가 크지 않기 때문에 시민들은 자전거를 선호한다. 짧은 거리는 오히려 자전거가 더 빠를 수가 있다. 아네트와 함께 뮌스터 시내를 걸을 때 가장 자주 들었던 단어가 바로 ‘자전거’였다. 언제 어디서나 튀어나올 수 있으니 자전거를 잊지 말아달라는 말을 그녀는 잊지 않고 말해주었다. 기차역에는 자전거 주차장이 있으며, 신호대기를 할 때에는 자동차보다 가장 앞 줄에 자전거가 서 있다. 뒤에 오는 자동차들이 자전거의 존재를 손쉽게 알 수 있도록 말이다. 비가 많이 올 때는 버스를 이용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자전거가 시민들의 발이 된다. 나와 같은 관광객들도 손쉽게 자전거를 빌릴 수 있는 렌탈숍이 있으며, 개개인의 키에 맞춰 자전거 높이를 조정시켜주는 직원들이 있다. 아네트는 뮌스터를 보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자전거를 타면서 보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같이 갔던 지인들은 자전거를 타고 뮌스터 도심과 외곽의 호수까지 곳곳을 방문했고, 그 순간들은 정말 특별했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당시 망막에 이상이 생겨 원근감이 사라져버려서 자전거를 탈 수가 없어서, 자전거를 대여하고서 반납해야만 했다.)
독일의 작은 도시 뮌스터, 10년에 한번 세상의 중심이 되다.
이번 2017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서 가장 화제가 된 작품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After Alife Ahead(2017)’

1977년 시작하여 10년에 한번 100일동안 열리는 공공 미술 행사,
조각 프로젝트 뮌스터(Skulptur Projekte Münster (SPM))
세계에 뮌스터라는 작은 도시를 알리다.


아름다운 자연과 대학이 있는 도시. 뮌스터를 특별하게 만들고, 세계인이 주목하게 한 것은 바로 40년이라는 세월이 만들어낸 행사, 조각 프로젝트 뮌스터 덕분이다. 10년을 주기로 만들어지는 그래서 40년동안 5번의 행사밖에 만들어내지 못한 매우 느리고도 느린 행사. 전세계 예술가들은 물론 예술관련 종사자 그리고 이제는 일반인들까지도 큰 관심을 갖게 되어 이미 1997년 방문자가 지역 주민의 약 2배에 해당하는 50만명으로 경제적 이득까지 가져다 준, 세계적으로 찾기 힘든 희소성 높은 행사의 시작은 예상 외로 험난했다.

1970년대 조지 리키(George Rickey)가 그의 키네틱 조각 작품인 “3개의 회전 사각형(Drei rotierende Quadrate)”을 뮌스터에 설치하려고 했다. 당시 이 작품의 설치에 대중들의 격렬히 반대했다. 전쟁의 폐허에서 새롭게 건설된 역사적인 도시에 기이한 조형물을 설치한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납득하지 못했다. 당시 뮌스터의 베스트푈리췌스 란데스뮤지엄(Westfälisches Landesmuseum)의 디렉터였던 클라우스 부스만(Klaus Bussmann)과 뮤지엄 루트비히(Museum Ludwig)의 큐레이터는 대중들의 불만은 줄이고, 공공 예술에 대한 이해와 교육을 증진시키기 위해 1977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첫번째 프로젝트에서는 당시의 실험적인 경향을 반영하여 남성 작가들로만 구성되었다. 미국 미니멀리즘 조각가 칼 안드네(Carl Andre), 전위적 아티스트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미국의 화가 도널드 저드(Donald Judd), 영국의 전위미술가 리처드 롱(Richard Long), 개념 미술가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 스웨덴의 팝 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 미국 조각가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등이 참가했다. 지금은 모시는 것만으로 영광이 되는, 예술의 한 역사이기도 하고, 여전히 세계적인 컨템포러리 아티스트들인 그들이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를 위해 모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뮌스터 지역 신문들의 반응은 비관적이었다. 1977년에 어렸던 아네트는 당시의 분위기를 기억한다고 했다. 보수적인 뮌스터의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런 것에 돈을 쓰는 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40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뮌스터 시민들은 이 프로젝트를 개최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그 변화를 직접 경험한 아네트의 이야기를 들으며 뮌스터 시내를 걸으면서, 공간이 가진 축적된 시간의 힘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독일의 작은 도시 뮌스터, 10년에 한번 세상의 중심이 되다.
제레미 델러(Jeremy Deller)의 ‘Speak to the Earth and It Will Tell You’ (2007-2017) @photographed by Hani Oh

별도의 입장료가 없는 무료 전시,
10년에 한 번 도시 전체가 예술 전시장이 된다.
도시에 파생된 경제적 이익을 위해 10년에서 5년마다 개최하자는 의견을 끝까지 반대한 프로젝트 설립자의 고집이 행사와 도시를 지켜내다.


10년에 한번 열리는 조각 프로젝트는 도시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1987년 뮌스터, 베스트팔렌 주, 프라이빗 펀드를 통해 이 행사를 위해 $65만불(현재 한화 약 7억 4천만원)의 비용이 지출되었다. 그리고 1997년 50만명 이상의 방문객이 도시를 찾았고, 2017년에는 6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올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유럽만이 아닌 아시아에서도 많은 이들이 찾고, 아티스트, 큐레이터만이 아닌 직장인, 대학생들이 예술 관람을 위해 관광을 오기도 한다. 이는 도시의 수입을 증가시켰다. 입장료 없는 무료 전시지만,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관련 서적을 구입하고 자전거를 빌리는 데 돈을 지출했다. 도시로 돌아온 경제적 이익으로 인해 2007년 행사 후 지역의 권위자들은 이 행사를 10년에 한번이 아닌 5년에 한번으로 더 자주 개최하자고 주장했다. 행사의 설립자인 쾨니그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심지어 그런 주장을 한 이들에게 이 행사가 5년에 한번 개최될 경우 고등법원까지 갈 각오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10년이라는 길고 느린 시간이 선사하는 변화, 사회와 연관되는 이 변화를 시험해보는 최고의 방식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그의 강력한 의지로 인해 결국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그 시간이 제공하는 예술,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심사숙고하여 완성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나는 특별한 가치를 확립시켰다.
독일의 작은 도시 뮌스터, 10년에 한번 세상의 중심이 되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작품이 있는 곳은 길에 그려진 사인을 보면서 확인할 수 있다. @photographed by Hani Oh


관광객 유치를 위해 개최한 행사가 아닌 대중을 교육시키기 위한 예술적 그리고 실험적 시도
그 정신을 진정성있게 이어나가며 예술적 가치를 지키는 행사


관광객 유치를 위해 유행에 편승한 행사가 아니다. 잠깐의 수익을 위해 행사의 정체성이 흔들릴 뻔도 했지만, 설립자의 강력한 의지는 결국 받아들여졌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해당 전시를 위해 아티스트들에게 요구하는 테마나 형태가 없다. 전시회 그 자체로 아티스트들이 먼저 그들의 작품을 제안하고 그것이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를 성장시킨다. 아티스트들은 뮌스터를 방문하고 자신들의 작품과 잘 어울릴 장소를 직접 찾는다. 심지어 행사의 설립자인 쾨니그는 방문한 아티스트에게 뮌스터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방법은 자전거라며 하루 종일 아침 10시부터 밤 9시까지 자전거로 뮌스터 도심과 외곽을 다니기도 한다. 행사가 가진 정신을 구현하는 예술가에게 이만큼 그 본질이 잘 전달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듯 싶다. 이제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2017년 처음으로 인근에 자리한 산업도시 말Marl에서 확장 전시를 한다. 올해 5년마다 열리는 독일 카셀 도큐멘타가 그리스와 연계하여 전시를 열었고,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말을 선택했다. 남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도시들도 검토해본 후에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뮌스터와 말, 두 도시의 재건설, 급진적인 시작이라는 비슷한 정체성이 말을 선택한 이유라고 쾨니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밝혔다. 과거에는 경제적으로 막강했던 독일의 많은 도시들이 죽어가고 있고 말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쾨니그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그들이 대중들에게 공공 예술을 교육시키고자 했던 1977년의 그 때처럼 어쩌면 지금 사라지는 도시들에 새로운 숨결을 넣을 수 있는 것은 예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말에서 확장 전시를 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의 작은 도시 뮌스터, 10년에 한번 세상의 중심이 되다.
오후 한 때,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들어온 뮌스터 LWL – Museum für Kunst und Kultur 뮤지엄의 카페 @photographed by Hani Oh

이른 아침부터 이번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After Alife Ahead(2017)’를 보기 위해 택시를 타고 외곽으로 나왔다. 예전에 아이스링크였던 공간을 마치 화성처럼 변신시켜놓은 작품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제레미 델러가 지난 2007년 정원을 가진 주민들에게 씨앗을 주고, 그 식물이 자라는 동안의 10년간의 일기를 기록한 책들이 전시된 콜로니 가든으로 가기도 했다. 존 나이트(John Knight)의 ‘A Work in Situ’와 그 외 작품들을 만나기 위해 뮌스터 LWL – Museum für Kunst und Kultur을 찾아가고, 그렇게 도심 곳곳에 자리한 작품들을 찾기 위해 마치 보물지도를 들고 항해를 하듯 그렇게 뮌스터 곳곳을 탐험했다. 그 자리에 서서 왜 작가가 이 자리에 이 작품을 설치하였는지, 뮌스터의 꽃향을 품은 산들바람을 만나며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다. 뮌스터는 진정성이 담긴 예술이라는 컨텐츠로 전세계에 자리매김을 한 도시이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교육이라는 컨텐츠가 제공하는 젊은 라이프 스타일, 그리고 무엇보다 전세계적으로 이례적인 10년에 한번 열리는 경험하는 것에서부터가 흔하지 않은 공공 행사. 40년, 묵묵히 행사를 이끌어나간 설립자들과 후원자들 그리고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 비전을 공감하고 이제는 돕는 시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훌륭한 아이디어, 컨텐츠가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도시이다. 2010년 한국의 도시로 약 100만명이 거주하는 창원시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LivCom Award를 수상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후에는 뮌스터 같은 도시를 한국에서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2027년 다시 찾은 뮌스터의 땅과 공기, 그리고 그 안에 자리잡은 예술작품들은 내게 어떤 말을 속삭여줄지를 기대해본다.

*답사에 도움을 주신 뮌스터 관광청의 줄리앙 웅켈바흐(Juliane Unkelbach)와 아네트 슈타트보이머(Annette Stadtbäumer)에게 큰 감사를 드립니다. Special thanks for Juliane Unkelbach and nnette Stadtbäumer at Stadt Münster for helping me to view the city.

오하니(Hani Oh)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향수 프로듀서
현) 한국법제정책연구회 도시정책컨설팅센터장
현) 한국향문화연구소 대표
현) 뷰티, 패션, F&B, 도시 등 다수의 브랜딩 및 컨설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전) 인큐 브랜드 이사
< 여우야, 뉴욕가자> 저자
뉴욕 패션스쿨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패션 머천다이징 매니지먼트 전공
뉴욕 F.I.T. 이미지 컨설팅 수료
프랑스 파리 퍼퓨머리 향수 제작 워크샵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