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설날, 오탁번

<사진 제공 : 류남수님>


설날



오탁번



설날 차례 지내고


음복 한 잔 하면


보고 싶은 어머니 얼굴


내 볼 물들이며 떠오른다



설날 아침


막내 손 시릴까 봐


아득한 저승의 숨결로


벙어리장갑 뜨고 계신



나의 어머니



[태헌의 한역]


元日(원일)



元日行禮後(원일행례후)


飮福酒一杯(음복주일배)


願見慈母顔(원견자모안)


霑頰想起來(점협상기래)


元旦母所恐(원단모소공)


季兒兩手凍(계아양수동)


漠漠九原上(막막구원상)


猶織手巴掌(유직수파장)



[주석]


* 元日(원일) : 설날.


行禮(행례) : 제사 등의 예식을 행하다. / 後(후) : ~한 후에.


飮福(음복) : 제사를 마치고 나서 참석한 사람들이 신에게 올렸던 술이나 제물(祭物)을 나누어 먹는 일. 신이 내리는 복을 받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음복이라 하였다. / 酒一杯(주일배) : 술 한 잔. 술은 음복주(飮福酒)를 가리킨다.


願見(원견) : 보기를 원하다, 보고 싶다. / 慈母顔(자모안) : 어머니의 얼굴.


霑頰(점협) : 뺨을 적시다, 볼을 적시다. / 想起來(상기래) : 생각나다, 생각이 떠오르다.


元旦(원단) : 설날 아침. / 母所恐(모소공) : 어머니가 걱정하는 바, 어머니가 걱정하는 것.


季兒(계아) 막내, 막내아들. / 兩手(양수) : 두 손. / 凍(동) : 얼다, 시리다.


漠漠(막막) : 아득하다. / 九原(구원) : 구원, 구천(九天), 저승. / 上(상) : ~ 위에서, ~에서.


猶(유) : 오히려, 여전히.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織(직) : ~을 짜다, ~을 뜨다. / 手巴掌(수파장) : 벙어리장갑.



[한역의 직역]


설날



설날 차례 지낸 후에


음복주 한 잔 하면


보고 싶은 어머니 얼굴


볼 적시며 떠오른다



설날 아침 어머니 걱정은


막내의 두 손 시리게 되는 것


아득한 저승에서


여전히 벙어리장갑 뜨고 계신다



[한역 노트]


명절이 오히려 더 슬픈 사람들이 있다. 피붙이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명절은 슬픈 시간과의 조우(遭遇)가 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사별이든 생별이든 피붙이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붙이에 대한 그리움 역시 세월에 씻겨 빛바래기 마련이라 하여도, 해마다 반복되는 명절과 제사 등이 있어 그 그리움은 여타의 그것과는 달리 시간에 의해 금세 마모되지는 않는다. “명절 만날 때마다 어버이 생각이 갑절이나 된다.[每逢佳節倍思親(매봉가절배사친)]”고 노래한 당(唐)나라 왕유(王維)의 시구(詩句)가 100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의 간극(間隙)을 뛰어 넘어 지금에도 여전히 설득력 있게 들리는 까닭은, 사람의 자식된 자들의 보편적인 심사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탁번 시인의 위의 시는, 새해의 희망을 노래한 밝은 설날 시가 아니라 피붙이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애잔한 설날 시이다. 역자는 처음으로 이 시를 대했을 때 제2연과 제3연의 내용을 문면적(文面的)으로만 해석하여, 시인의 어머니께서 시인이 어릴 적에 세상을 떠나셨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하여 돌아가신 어머니에게는 시인이 어린 막내로만 기억되어, 어머니가 저 세상에 계시는 지금에도 시인을 위해 벙어리장갑을 뜨고 계신다는 말로 시의(詩意)를 결속시킨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역자의 이러한 해석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시인의 어머니께서는 시인이 중년일 때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역자가 혹시나 싶어 시인에게 확인해보지 않았다면 역자의 추정은 그야말로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소설 역시 해석학의 하나가 된다 하여도 시인에게는 더없는 결례가 아닐 수 없다. 면구스러운 일을 면하게 된 게 역자에게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옛사람들은 본인의 나이와 관계없이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자신을 칭할 때 ‘고아(孤兒)’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모님 앞에서는 언제나 어린 아이임을 자처하였기 때문에 나이 70에 어버이 앞에서 아이들 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는 ‘노래지희(老萊之戱)’와 같은 에피소드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시인이 이 시에서 언급한 ‘벙어리장갑’ 역시 같은 맥락이다. 어머니에게는 자신이 언제나 어린 막내일 수밖에 없다고 여겨, 어머니께서 저승에서도 자신을 위해 벙어리장갑을 뜨고 계신다고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절절한 모정(母情)에 대한 그리움인가! 어쩌면 시인의 기억 한 켠에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떠주셨을 벙어리장갑이 어제 받은 선물인 듯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을 듯하다.


그리움 속에서는 세월도 멎는다. 추억(追憶) 속의 사람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기 때문에 그 추억 속에서 영원을 사는 셈이다. 특히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가기 마련인 명절날에 시인이 마신 한 잔의 음복주는, 그리움의 마중물을 넘어 그리움을 증폭시키는 마법의 액체가 되었다. 이쯤에서, 술을 시름을 잊게 하는 물건(物件)이라는 뜻의 망우물(忘憂物)로 부르듯이, 음복주를 그리움을 더하게 하는 물건이라는 뜻의 증사물(增思物)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요즘 같은 전대미문의 ‘코로나 시대’에는 음복주를 ‘증사물’로도 마시고 ‘망우물’로도 마셔야겠기에, 설날 음복주가 아무래도 한 잔으로는 부족할 듯하다.


역자는 3연 9행으로 된 원시를 8구의 오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한역하는 과정에서 제2연과 제3연의 구법(句法)을 수정하여 마지막 행의 “어머니”를 주어로 하는 시구로 재배치하는 한편 “아득한 저승의 숨결로”를 “아득한 저승에서”의 의미로 조정하였다. 한역시는 1구부터 4구까지는 짝수 구에 압운을 하고, 5·6구와 7·8구는 각기 매구에 압운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杯(배)’·‘來(래)’, ‘恐(공)’·‘凍(동)’, ‘上(상)’·‘掌(장)’이 된다.


2021. 2. 9.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