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특집 - 생활 속의 시> 석 줄의 잠언, 오수록


<사진제공 : 오수록님>


석 줄의 잠언



오수록



빗방울에도


젖지 않는


연잎처럼 살라



사물을 비추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거울처럼 살라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을 벗어난


은자처럼 살라



[태헌의 漢譯]


三行箴言(삼행잠언)



願君生如蓮(원군생여련)


雨滴終不潤(우적종불윤)


願君生如鏡(원군생여경)


照物不留痕(조물불류흔)


願君生如隱(원군생여은)


在世猶出塵(재세유출진)



[주석]


* 三行(삼행) : 석 줄. / 箴言(잠언) : 잠언.


願君(원군) : 그대에게 원하노니. / 生如蓮(생여련) : 연꽃[연잎]처럼 살다.


雨滴(우적) : 보통은 빗방울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비가 방울지다.’는 의미로 쓰였다. / 終不潤(종불윤) : 끝내 젖지 않다.


生如鏡(생여경) : 거울처럼 살다.


照物(조물) : 사물을 비추다. / 不留痕(불류흔) : 흔적 남기지 않다.


生如隱(생여은) : 은자처럼 살다. ‘隱’은 단독으로 쓰여도 ‘隱者(은자)’의 뜻이 되기도 한다.


在世(재세) : 세상에 있다. / 猶出塵(유출진) : 세속을 벗어난 것과 같다.



[직역]


석 줄의 잠언



원하노니 그대,


비가 방울져도 끝내 젖지 않는


연잎처럼 살라



원하노니 그대,


사물 비추되 흔적 남기지 않는


거울처럼 살라



원하노니 그대,


세상에 있어도 세속을 벗어난


은자처럼 살라



[한역(漢譯) 노트]


이 시는 야은(野隱) 오수록(吳壽祿) 시인이 개불(介弗) 김동철(金東哲) 선생의 정년퇴임[서울 문일고]을 축하하기 위하여 지은 시이다. 두 분은 현재 역자가 좌장(座長)으로 있는 시회(詩會)의 멤버이다. 작년 연말 어느 날, 개불 선생에게 정년퇴임 축시를 지어드리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내었을 때 야은 선생이 그 임시에 바로 이 시를 지었더랬다.


야은 선생의 이 시는, 퇴임 후에 펼쳐질 제2의 인생을 앞두고 있는 분에게 들려준 덕담이다. 겪을 것 다 겪어서 알 것 다 아는 나이라고 할 수 있는 분에게 이런 덕담을 들려준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따스한 정이 아닐 수 없다. 시의 내용이 꼭 은퇴자에게만 요긴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노추(老醜)를 경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땅의 모든 은퇴자들에게 일독을 권할 만하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름다워야 한다. 그래야 존경 받을 수 있고 존재의 이유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노마지지(老馬之智)와 같은 그런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저 노탐(老貪)과 노욕(老慾) 같은 노추뿐이라면 정말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이겠는가!


3연 9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6구의 오언고시로 한역하였다. 원시의 제목에 쓰인 ‘석 줄’의 의미를 한역시에서는 살리기가 만만치 않아 부득이 [직역]에서 이를 살려보았다.


역자가 이 무렵에 개불 선생을 위하여 지은 퇴임 축시는 아래와 같다.



賀介弗先生停年退任(하개불선생정년퇴임)


先生敎史過三十(선생교사과삼십)


訪古傳新師德垂(방고전신사덕수)


滿任收鞭離校日(만임수편리교일)


以詩羞代頌功碑(이시수대송공비)



개불선생의 정년퇴임을 경하하며


선생께서 역사 가르친 지 서른 해가 넘었나니


고적 탐방하여 새것 전해 스승의 덕 드리웠네


임기가 차서 채찍 거두어 학교 떠나시는 날에


시로써 부끄럽게 공적 기린 비석 대신합니다



역자의 이 시는, 야은 선생이 다가올 날을 위해 덕담을 들려준 것과는 달리, 개불 선생의 지나온 날에 무게중심을 두고 축하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사전(事前)에 미리 말을 맞춘 것도 아닌데 우연히 두 시가 표리를 이룬 듯해 역자는 무던히도 기뻤다. 비슷한 방향의 비슷한 언어로 쓰인 축시가 아니니 다행한 일이 아닌가? 이것은 역자가 보기에 개불 선생의 복이다.


정년퇴임을 미리 축하하는 시회 멤버들의 뒤풀이 자리에서 개불 선생이 준비해온 고급 중국술만큼이나 감칠맛이 났던 것은 송제(松濟) 선생의 담론이었다. 퇴임 후의 삶과 관련한 무슨 얘기 끝에 송제 선생이 꺼낸 ‘자긍심(自矜心)’에 대한 지론(持論)은 듣는 순간에 바로 시가 되겠구나 싶어 즉석에서 메모를 부탁하였더랬다. 자리가 파하고 나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면서……



자긍심이 낮으면


자신을 믿지 못하고


남에게 탓을 돌리며


복수에 목말라 한다



이것이 송제 선생이 그날 메모한 원문이다. 그 다음날 역자는 이를 아래와 같이 한역해 보았다.



自矜心(자긍심)


人無自矜心(인무자긍심)


不可信其軀(불가신기구)


臨事好尤人(임사호우인)


恒渴於報仇(항갈어보구)



자긍심


사람에게 자긍심이 없으면


그 자신을 믿지 못하고


일에 임하여 남 탓 잘하며


늘 복수에 목말라 한다



영문학을 전공한 송제 선생은 이를 다시 영역(英譯)까지 하였다.



Self-esteem


If the self-esteem is lacked,


They don’t believe in themselves,


Always put the blame on others,


And burn with vengeance packed.



역자는 시회에서나 학교에서나 메모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한다. 누구나 인정하는 바겠지만 사람의 생각과 말은 휘발성이 정말 강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잡아두기 위해서는 메모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 메모하고 또 메모하라! 그리고 세상을 메모하라! 그것은 당신의 글이 되고 시가 되고 우주가 될 것이다!


개불 선생은 <미리 써 본 퇴임사>라는 글에서 “삶은 유한하다. 나의 직업도 유한했다. …… 이제 퇴직을 하지만 끝까지 인생을 구가하며, 또 다른 곳에서 참여와 배려·나눔 등의 삶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분과 함께 한시(漢詩)를 공부하며 인생을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역자나 시회 멤버들에게 분명 하나의 복이리라.


2020. 2. 18.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