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니 나의 고교시절은 빛나는 여고시절도, 다시 돌아가고픈 그리운 시간도 아니었다. 우울하고 흐린 무채색에 가까웠다. 모든 것이 미숙했고 혼란스러웠으며 지독한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다. ‘관계’가 전부인 학창 시절이었지만 낯가림이 심하고 내성적이었던 탓에 남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적성과 흥미는 완전히 무시한 채 천편일률적으로 배워야 하는 교육과정도 내 우울의 원인이었다. 개별 자아는 소멸되었고 그 자리에는 ‘학생’이라는 사회적 자아만이 남았다. 용케도 그 시간을 견뎌왔구나 싶을 만큼 외로움과 소통 부재라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던 학창 시절을 떠 올리게 했던 영화 <파수꾼> 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거칠게 요약한다면 ‘왕따로 인한 고교생의 자살’쯤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세 아이들 각자의 입장에서 그날을 복기하고 되돌아보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실하게 대변한다. 부분이 전체로 환원될 수 없는 세상에서 잃어버린 한 조각의 퍼즐을 위해 오래 고민한 흔적이 묻어있는 영화, <파수꾼>을 그래서 좋아한다.

한 소년이 죽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아버지는 서랍 속에서 발견한 사진 한 장에 의지에서 아들의 친구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한 명은 전학을 가버렸고 나머지 한 명은 자퇴를 한 상태로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음을 느낀 아버지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아이들을 만나게 되고 사건의 실체가 하나씩 드러나게 된다.

엄마의 부재와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결핍을 느끼며 학창시절을 보내던 기태에게 있어 친구들의 존재는 단순한 친구 그 이상의 의미였다. 기태는 ‘집’이라는 안전지대가 없었기 때문에 ‘학교’를 자신의 구역으로 삼은 채 ‘친구들의 인정과 사랑’을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받았다. 기태가 희준과 동윤에게 절박하게 매달린 이유였다. 희준은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지만 그녀가 기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기태를 멀리한다. 기태도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희준을 생각해서 그녀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희준은 끝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동윤은 여자친구의 자살시도가 기태가 나쁜 소문을 흘리고 다닌 탓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순간 무시당하고 버림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소통은 단절되었고 오해는 점점 부풀려져 끝내는 서로를 다치게 했다.

관심받기 위해 끊임없이 ‘나 좀 봐 줘’라고 칭얼댔지만 관계에 서툴렀던 기태는 소통의 도구로 폭력을 사용하게 된다. 친구를 옆에 두고 싶었지만 말로 소통하는 방법을 몰랐던 기태는 힘으로 친구를 묶어두고자 했고 이로 인해 결국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기태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라고 묻지만 기태의 절박한 물음에 동윤은 ‘처음부터 너만 없었으면 돼’라고 냉정하게 답한다. 기태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오랜 친구 동윤마저 돌아서자 기태는 ‘너까지 이러면 안 돼’라고 절규한다. 친구들에게서 밀려난 기태가 설자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공동체가 붕괴된 교실에서 권력에서 밀려나고 자존심을 다친 아이들의 선택지는 생각보다 좁다. 기태에게 차라리 죽음이 더 쉬운 선택이었던 이유다.

기태의 죽음으로 남겨진 아이들의 고통도 외면할 수 없다. 기태가 떠나버린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던 동윤은 자퇴 후 방황하며 고통을 고스란히 떠 안은 채 살아간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사건은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모두에게 상처로 남았다. 동윤은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법속에서 평생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상처가 아물더라도 흉터는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있는 법이니 말이다.

교실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이 작은 사회가 굴러가기 위해 아이들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서열’이라는 법칙을 빌려온다. 기태를 지탱해 주었던 힘의 논리가 희준에 의해 무시당하자 기태는 무너지고 만다. 작은 교실이 세상의 전부인 아이들에게 교실 속 작은 풍랑은 나비효과가 되어 일파만파 위력을 발휘한다. 폭풍 속에 휘말린 아이들은 상처를 보듬어 주는 대신 더 아프게 서로를 찌를 뿐이다. 시간이 지난 후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터널의 한 가운데 있을 때는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 결과 아이들에게는 가해자와 피해자, 방관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하지만 기태 아버지가 원했던 확실한 가해자나 명확한 답은 애초부터 없었다. 기태 아버지는 끝내 아이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진실은 아버지에게서 가장 멀리 있었다. 겉돌기만 하던 아버지 캐릭터는 기태를 지켜주지 못한 또 하나의 실패한 파수꾼이었다. 영화 속 어른은 성숙한 존재가 아니었고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호밀밭의 파수꾼도 아니었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의 원인을 ‘집 밖’에서 찾고자 하는 불안하고 미숙한 인간에 불과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했고 아이들도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했다. 제대로 된 파수꾼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어른들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은 감정을 공감하고 나누는 방법을 몰랐다. 자존심을 지키는 올바른 방법도 알지 못했다. 아이들의 정서 형성과 인성발달의 과정 속에 철저히 배제된 어른들의 모습을 통해 애초부터 아이들에겐 누군가를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아이들을 보며 우리가 지나온 터널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그 시기를 무사히 통과한 것은 우리가 기태보다 더 단단해서는 아닐 것이다. 숱한 서사에서 소년은 아픈 통과의례를 거쳐 ‘성장’ 하고 ‘자란다’. 하지만 영화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어쭙잖은 성장 신화를 답습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상처가 영원히 치유되지 못한 채 죽을 때까지 그 짐을 안고 가야 한다는 냉정한 진실과 마주하게 할 뿐이다. 현실의 성장은 고통 끝에 따라오는 훈장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딜레마에 익숙해지는 과정에 가깝기 때문이다. 죄의식과 부채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떠안은 동윤이 홀로 선로에 남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동윤이 감내해야 할 시간의 무게는 가늠조차 힘들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다’고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 고, 그리고 ‘잘 자라 주어 고맙다’는 위로를 전하고 싶다.

영화 <파수꾼> 은 윤성현 감독의 데뷔작으로 독립영화이다. 국내외 각종 영화제에서 받은 많은 상은 감독의 연출력에 대한 방증이었다. 사춘기 아이들의 미묘한 심리와 그들만의 리그를 말투와 표정 하나하나에 섬세하게 담아냈다.“파수꾼은 죽음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영화이다. 학생들의 자살 사건이 일어나면 신문에는 한 줄로 쓰여질 뿐”이라며 행간의 숨은 의미를 영화에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과 사건의 결과만을 본다. 그 이면의 드러나지 않은 사연과 진실은 보지 못한 채 기사 한 줄로 사건은 종료된다. 감독은 우리가 외면하고 살아가는 세상의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해 ‘파수꾼’ 이 되어 지켜주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 때 누군가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 아무도 지켜줄 수 없었고 스스로마저 지켜내지 못했던 아이들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