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들꽃, 박두순

박두순



밤하늘이


별들로 하여


잠들지 않듯이



들에는 더러


들꽃이 피어


허전하지 않네



너의 조용한 숨결로


들이


잔잔하다



바람이


너의 옷깃을 흔들면


들도


조용히


흔들린다



꺾는 사람의 손에도


향기를 남기고


짓밟는 사람의 발길에도


향기를 남긴다



【태헌의 한역】


野花(야화)



夜天因星不入睡(야천인성불입수)


野由野花不空虛(야유야화불공허)


汝氣安穩野寂靜(여기안온야적정)


風搖汝衣野亦搖(풍요여의야역요)


野花遺香折人手(야화유향절인수)


野花遺香踏人趺(야화유향답인부)



[주석]


* 野花(야화) : 들꽃.


夜天(야천) : 밤하늘. / 因星(인성) : 별로 인하여, 별 때문에. / 不入睡(불입수) : 잠에 들지 못하다, 잠을 이루지 못하다.


野(야) : 들. / 由野花(유야화) : 들꽃으로 말미암아, 들꽃 때문에. / 不空虛(불공허) : 공허하지 않다, 허전하지 않다.


汝氣(여기) : 너의 기운, 너의 숨결. / 安穩(안온) : 평안하다, 조용하다. / 野寂靜(야적정) : 들이 고요하다, 들이 잔잔하다.


風搖汝衣(풍요여의) : 바람이 너의 옷을 흔들다. / 野亦搖(야역요) : 들 또한 흔들리다.


野花遺香(야화유향) : 들꽃이 향기를 남기다. / 折人手(절인수) : 꺾는 사람의 손.


踏人趺(답인부) : 밟는 사람의 발꿈치, 밟는 사람의 발.



[직역]


들꽃



밤하늘은 별들로 인해 잠들지 않고


들은 들꽃으로 말미암아 허전하지 않네


너의 숨결 조용하여 들이 잔잔하고


바람이 너의 옷깃 흔들면 들 또한 흔들리지


꺾는 사람 손에도 들꽃은 향기를 남기고


짓밟는 사람 발에도 들꽃은 향기를 남긴다



[한역 노트]


우리 현대시에는 들꽃을 노래한 시가 정말 많아 들꽃시만 모아둔 시선집을 엮더라도 족히 열 권 이상 분량은 나올 듯하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한 편의 시도 하나의 들꽃이 아닌지 모르겠다. 역자는 그 많은 들꽃시 가운데 이 들꽃시를 처음으로 6구의 칠언고시(七言古詩)로 한역해 보았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역자는 원시 제1연의 서술을 평서문 투로 바꾸고, 제2연의 ‘더러’를 누락시킨 뒤 ‘들꽃이 피어’를 ‘들꽃으로 말미암아’로 옮겼으며, 제4연의 ‘조용히’를 누락시킨 위에 제5연의 ‘발길’을 ‘발’로 바꾸고서 생략된 주어를 복구시켰다. 이 외에는 원시에서 사용된 시어나 원시에서 구현된 심상을 가급적 시화(詩化)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늘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은, 역자가 아무리 원시의 원의(原義)를 시화시키려고 노력하더라도 원시의 언어와 역시의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間隙)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역시는 짝수 구에 압운하였으며, 압운자는 ‘虛(허)’, ‘搖(요)’, ‘趺(부)’이다.


박두순 시인의 이 시는 프랑스 미술가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의 작품 가운데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힌다.”는 제목의 판화를 떠오르게 한다. 역자는, 들꽃 향기가 피어나는 들길을 걸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들꽃을 노래한 시를 대할 때면 까마득한 시절에 어느 소녀에게 적어 보냈던 부끄러운 언어가 저절로 입안에 고인다. 그렇게 세월은 가도 언어는 남는 것이리라.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지금 이름 모를 들꽃을 보고 있다.


벌 나비의 눈길도 닿지 않을 곳에 앉아


이토록 가녀리게 피워 올린 들꽃, 들꽃들……


이슬에 목욕하고 내려앉은 별이면 이러할까?


바람에 나풀대는 선녀의 옷자락이면 이러할까?


그대 없어 황량했던 내 마음의 들녘에


오늘도 그대는 들꽃으로 피어난다.



2019. 7. 16.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