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 인근 케피소스 강가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여인숙을 차려 놓고 손님이 들어오면 집 안에 있는 쇠 침대에 눕혔다. 키가 침대보다 커서 밖으로 튀어나오면 침대의 크기에 알맞게 머리나 다리를 톱으로 잘라내고, 작으면 몸을 잡아 늘여서 죽였다.
[황라열의 블록체인 인사이트] (1) 거대한 괴물의 탄생, ICO
최근 들어 사람들은 정부의 블록체인 정책을 두고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세상 모든 것들의 기준을 정하고 이를 강제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행태와 유사하다며 비아냥거린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왜 굳이 사람들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여인숙에 제 발로 찾아가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블록체인의 기본 개념은 ‘탈중앙화’다. 즉, 정부의 규제 및 중앙집권화된 시스템으로부터의 독립이 애당초 전제되어있는 개념이자 기술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대한민국의 블록체인 생태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분산’이 아닌 ‘집중’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일단 여러 협회가 생겨나고, 또 이 협회들은 뭔가 힘이 있는 사람들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그 대상은 사람들이 한 번 들으면 알만한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들이다. 이렇게 덩치를 키운 단체들은 다시 하위 스타트업들을 묶어나가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 부피가 커지면 영향력을 발휘하여 정부 정책에 대해 압박을 하기 시작하면서 힘겨루기에 들어간다.

그냥 프로크루스테스를 무시하면 될 것을, 왜 맞서 싸우려 하는 것일까. 그 답은 ICO에 있다. 현재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필드는 넘쳐나지만, 정작 모든 관심은 ICO와 코인으로 쏠리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야 할 곳은 철저히 외면받고 있고, 돈이 몰리는 ICO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다. 어떤 이들은 정부를 프로크루스테스에게 빗대어 무차별 공격을 퍼부어대지만, 사실 정부가 막고 있는 것은 블록체인 기술이 아닌,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개념인 ICO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솔직히 그 외의 분야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어 보일뿐더러 그에 대해 전문 지식 또한 그리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이쯤 되다 보니, 이젠 하루를 멀다 하고 멈추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ICO들이 괴물로 보이고, 이를 규제하는 프로크루스테스는 밤낮없이 ICO라는 괴물들을 침대에 맞춰 재단하는 고단한 노동자로 보일 정도다. 어쩌다가 ICO는 괴물이 되었을까. 그리고 ICO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정부는 이를 막으려고 이토록 애를 쓰고, 사람들은 그런 정부를 향해 톱질을 멈추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일까. 정말로 정부는 블록체인과 관련한 기술 자체를 막고 있는 것일까.

ICO는 Initial Coin Offering의 줄임말이다. Initial Public Offering의 IPO에서 가운데 단어만 Coin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이어지는 글들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일단 쉽게 요약하자면, ICO란 기업이 자금을 조달하는 데 있어 여러 가지 제약 조건이 있는 IPO의 방식을 벗어나 쉽고 편리하게 대중들에게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행위를 의미한다. 언뜻 보기에는 이게 무슨 문제냐고 하겠지만, 사실 투자라는 영역은 금융과 실정법의 메커니즘이 아주 복잡하게 얽혀있는 곳이다. 현재의 구조에서 ICO의 투자자는 백서라 불리는 문서 하나만으로 해당 사업을 판단해야하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코인을 지급받는 것으로 이후 기업의 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제공한다. 결국, 그것을 제대로 판단하는 것도 투자자의 몫이 아니겠냐고 주장하겠지만, 그 순간 우리가 어릴 적에 보았던 뱀 쇼를 하며 약을 팔던 약장수들을 처벌할 논리도 동시에 사라져버리고 만다. 현재 진행되는 사이비 ICO들에 비교하면 예전의 약장수들은 굉장히 양심적이다. 그들은 적어도 뱀 쇼나 불 쇼, 차력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시각적 즐거움이라도 제공했다.

약장수들이 선전하는 약이 그렇게 굉장한 효험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모을 일이 아니라 당장 자신들의 기술을 사주거나 투자를 해줄 제약회사를 찾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반인에게도 펀드레이징을 진행할 만큼 전망이 좋은 사업이라면 엔젤투자자들이나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이를 외면할 리도 없다. 기관 투자자들에게 투자를 유치하기 힘든 스타트업들의 경우를 바탕으로 방어 논리를 편다 하더라도 몇억 규모도 아닌, 몇백 억 단위의 ICO를 초기 기업이 진행한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황라열의 블록체인 인사이트] (1) 거대한 괴물의 탄생, ICO
이와 같은 이유로 현재의 ICO 판은 쉽게 자금을 모으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현대판 약장수들이 바글대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물론 이 안에서도 굉장히 훌륭한 기업들이 이와 같은 오해를 감수하면서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블록체인의 미래는 ICO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ICO와 코인 얘기로만 가득한 블록체인 판의 이야기들이 너무나 식상하고 고루한 탓에, 굳이 나까지 활자를 통해 그 불쾌함을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앞으로의 글들을 통해 블록체인의 본질적인 철학과 진보된 기술을 바탕으로 과연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물리적 시간은 참 버겁다.

프로크루스테스를 때려잡을 수 있는 테세우스와 같은 영웅의 탄생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괴물은 그곳에 있게 두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는 소리 없는 영웅들이 계속해서 탄생하기를 소망하며 그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을 지금부터 하나씩 소개하고자 한다.

황라열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