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열면 데스크탑 화면 상에 '하구로'란 홀더가
나를 눈엣가시처럼 노려본다.

일본 야마가타현 하구로산(羽黑山) 삼나무 숲길을 걷던 때가
지난 9월 13일이다. 그새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걷記' 정리를 않은 채
내팽겨쳐 놓았으니 주인장의 게으름이 밉상스러울 수 밖에 없었을 터.

 


홀더를 열어 '슬라이드쇼'로 숲길 풍경을 다시 떠올렸다.

지난 9월 11일, 만년설과 야생화가 공존하는 초카이山과
천년 삼나무숲길로 유명한 하구로山을 다녀왔다.
'월간山'이 창간 46주년 기념으로 기획한 일본 명산 트레킹 일정이었다.

 


다녀온 후, '日 초카이산(鳥海山)의 품에 안기다' 제하로 4회에 걸쳐
山블로그에 졸고를 올리느라 한동안 '하구로山'을 잊고 있었다.

전날 올랐던 해발 2236m 초카이山에 비하면 하구로山은 414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1400년 전 개산된 이래 山신앙의 영지로 알려진 명산이다.

2,446개의 돌계단을 따라 천년 삼나무길을 걸어 오르면 규모 큰 神社가 있다.
800만 신의 나라답게 일본에는 수많은 신사들이 있다.
그중 산신을 모시는 산악 신앙지가 바로 이곳의 신사다.

 


삼나무 숲길로 드는 초입, 데와삼산(出羽三山) 안내도 앞에 섰다.
가이드가 이 산의 개념도를 보며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데와(出羽)는 이 지역의 옛 지명이지요.
데와삼산은 7세기부터 갓산, 하구로산, 유도노산을 일컫는 말로
일본의 산악 신앙을 대표하는 山群입니다.

'갓산(月山)'은 1984m로 야마가타현 중앙에 자리잡은 '데와삼산'의 주봉으로
특히나 눈이 어마 무지하게 퍼부어 여름에도 스키를 즐길 수 있지요.
적설량이 엄청나다보니 신사에 접근하기가 어려워 갓산과 유도노산의 신사를
야트막한 하구로산에 합쳐 놓아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답니다.

이 산들은 각각 과거·현재·미래를 뜻합니다.
하여 일본인들은 이 산 모두를 순례하는 것이 곧 윤회(輪廻)라 믿고 있어
데와삼산 걷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수신문(隨神門)의 문턱을 넘어 힐링의 숲길로 들어섰다.
쭉쭉 뻗은 아름드리 삼나무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간밤에 내린 비로 바닥은 물기를 머금어 촉촉하다.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듯 하늘은 끄무레하고 공기는 습했다.
비가 온대도 비맞으며 걸어도 운치있을 그런 보석같은 숲길이다.


권위있는 여행誌 미슐랭가이드가 만점인 별 세개를 줄만큼 아름다운
삼나무 숲길은 산정까지 약 2km이며 2,446단의 돌계단이
완만하게 놓여져 있어 누구라도 걸어 오를 수 있다.

삼나무숲 사이로 난 참배길 돌계단은 에도(江戶) 초기에 만들어졌다.
낡은 돌계단 곳곳에 술잔, 표주박 등 조각물 33개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조각물을 전부 찾아내면 희망한대로 소원이 이루어진다하여
나름 살폈으나 信心이 부족한가, 눈에 들지 않았다.


15分정도 걸었을까, 왼편 숲 속에 古塔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본 동북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29.2m 높이의 5층목탑이다.
1966년 일본 국보로 지정된 탑이다.


대개 탑은 기단에서부터 탑의 상부로 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좁아지는데
이곳 5重塔은 그 비율이 약해 상부나 하부가 별차이가 없어
불안정한 느낌이다.

우리의 법주사 경내 5층목조탑 '팔상전'은 기단이 넓고 상부로 갈수록
급격히 줄어들어 탑 전체 모습이 매우 안정적인 것과 대비된다.

오층석탑 가까이에 1천년 넘었다는 삼나무, '지지스기(爺杉)'가
주위 삼나무들을 호령하듯 우뚝 서 있다.
'지지스기'는 할아버지 삼나무란 뜻이다.

삼나무는 개국신화에 등장할만큼 일본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나무다.
섬나라라 오래 전부터 배 만드는 주재료로 많이 이용되었고
목조주택, 생활가구 등에 삼나무가 자주 쓰였다.
그런 탓에 일본에 가장 흔한 나무가 됐다.


이처럼 대접받던 삼나무가 최근들어 홀대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꽃가루가 극성인 이른 봄이면 안과가 문전성시란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삼나무 꽃가루 알레르기에 시달린다고 한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삼나무 꽃가루 알레르기 예방을 위해 2016년부터
정부가 나서 삼나무를 대량 벌목하고, 꽃가루가 적은 수종으로
바꿔 나갈 것이라 한다.

아베 총리도 거들었다.
"일본인의 30%가 삼나무 꽃가루 알레르기를 갖고 있지요. 저 역시
삼나무란 말만 들어도 눈이 가려운 것 같습니다"라고.

어째 스토리가 옆길로 샌 느낌이다. 각설하고,


5重塔을 지나 뒤를 돌아보니 일행들이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5重塔에 매료되어 인증샷에 푹 빠진 모양이다.

태고의 신비를 오롯이 품은 삼나무 숲길은 혼자 걷는 기분도 좋다.
상상 그 이상의 고즈넉한 숲 공간을 홀로 유영하는 기분이랄까,
방전되어 메마른 감성이 말랑말랑하게 충전되는 느낌이다.


가뜩이나 습한데다 돌계단의 높낮이가 일정치 않아 바닥을 살펴가며
걷다보니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해 몰골이 영~ 아니다.
땀도 훔쳐내고 매무새도 고쳐 걸을 요량으로 걸음을 멈췄다.

먹으면 힘이 난다는 떡, 찌까라모찌(力もち)를 파는 쉼터 벤치에 앉았다.
요상한 복장을 한 현지 참배객이 미소 지으며 '곤니찌와'를 건넨다.
삿갓을 쓰고 손에는 금강장을 들었다. '야마부시'다.

修驗道를 행하는 사람을 일러 '야마부시'라 부른다.
이러한 모습으로 데와삼산을 다 돌면 '내세에 다시 태어난다'하여
옛날에는 스님이나 신관들이 주로 야마부시 수행에 나섰는데 최근에는
부부 또는 사업에 실패했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도
야마부시 수행에 나선다고 한다.






데와3산의 신들을 모셔놓은 '삼신합제전(三神合祭殿)'에 마당에 들어섰다.
참배객들에 섞여 신사의 여러 건축양식을 둘러봤다.
섬세하고 소박하고 정갈한 느낌이다.
곳곳에 매달아놓은 쪽지들이 특히 많이 눈에 띤다.
기복신앙적 요소를 이렇듯 신사가 충족시켜 주고 있는 모양이다.




신사를 벗어나 주차장에 이르자, 잔뜩 찌푸려있던 하늘은 그제서야
빗방울을 떨군다. 비에 젖은 숲내음이 상쾌함을 보탠다.

울울창창한 천년 삼나무 숲길에서 태고의 숨결을 느꼈다.
2,446단의 돌계단을 오르는데도 걸음이 무겁지 않았다.
노곤하던 몸과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다.

하구로山이 '치유의 숲길'로 입소문 자자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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