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하신 아버님의 뒤를 이어 가업으로 해 온 게 ‘봉제’였는데…/ 열심히 ‘봉제’ 하면 한 세상 보람있게 살아 갈 줄 알았는데…/ 아니 정년에 관계없이 일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이대로 앞으로 몇 년은 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까진 아니더라도 내년까진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제, 그 오랜 세월 함께 해 온 ‘봉제’를 내려 놓을까 합니다. 더불어 희망까지도요. 그동안 너무도 사랑했습니다! 나의 봉제공장….



얼마 전 페이스북 메신저로 날아든 지인의 메시지이다.

퇴근 후 부침개 놓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자리라 순간 울컥했다. 상당 시간 버거운 싸움을 해 온 그를, 더불어 저간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괜시리 화가 났다. 지인의 ‘봉제 사랑’은 실로 끝 간 데 없기에 더욱 그러했다. 좀 과장한다면 그의 머릿속엔 잠 자는 시간 빼고는 오로지 ‘봉제’ 생각 뿐인 그런 사람이다.



동대문 인근에서 바지 공장을 꾸려가고 있는 그는 재단기술에서 부터 봉제, 완성에 이르기까지 빠꼼이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부턴가 자신의 봉제공장 보다 남의 공장 사정에 더 신경을 쓰는 듯 했다.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봉제 소공인들을 위해 컴퓨터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무등록 공장주에게 사업자등록을 유도하고, 열악한 봉제공장 환경 개선을 위해 클린사업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렇듯 창신동 봉제골목의 제반 봉제환경을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 발품을 팔며 동분서주했다. 혹자는 그를 일러 창신동 봉제의 파수꾼이라고도 했다.



그의 오지랖은 이게 다가 아니다. 창신동 봉제 활성화를 위해 궂은 일도 마다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찾아 다녔다. 주변 봉제소공인들이 불편부당한 일을 겪게 되면 만사 제쳐두고 관할 구청으로, 서울시청으로 찾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관공서 실무 담당자들한테는 눈엣가시로 통했다. 그냥 지나치질 못하는 성격 탓이다. 그런다고 절대 무대뽀는 아니다. 누구보다도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논리적으로 풀어간다. 이런 그의 노력이 구심점이 되어 관련 협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2년 전의 일이다.



이제까지의 ‘봉제 사랑’이 각개격파식이었다면 협회 출범 이후의 그의 행보는 보다 조직적이 됐다. 소규모 봉제공장을 대상으로 사업자등록 교육과 폐섬유 순환 재활용 교육을 실시했다. 취약계층 여성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도 팔을 걷어부쳤다. 안전보건공단과 손잡고 클린사업장 조성에도 앞장 섰다. 뿐만이 아니다. 장애인 고용 취업설명회, 바이어유치 수주상담회 개최 등, 24시간이 부족할만큼 ‘봉제’와 한 몸 되어 동대문을 넘어 대한민국 봉제지킴이 역할을 다했다.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그였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그런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메시지를 받은 즉시 전화를 했다. 기가 많이 꺾인 목소리다. 그래도 티를 내지 않으려는 듯 껄껄 웃어 넘긴다.

“세상사 뜻한 바 대로만 간다면 너무 싱겁지요.”
동대문 DDP 인근에 서울시 관리 건물인 유어스 빌딩이 있다. 2년 전, 서울시는 심사를 통해 동대문 주변의 여러 소규모 봉제공장들 중 네 곳을 선정해 이 건물에 입주시켰다. 그의 바지 공장도 이에 편승했다. 이들 공장들은 샘플 및 소량 제작의 표준을 제시하고 의류 디자인 관련 학생들이 견학 오면 성실히 응대하며, 기술 교육에도 적극 협조해 동대문 의류 봉제공장의 롤 모델 역할을 다 하겠다는 조건으로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이다. 당시 입주 계약조건에는 ‘2년 계약에 재심사 후 2년 연장, 합이 4년’으로 되어 있다.

어느 봉제인의 씁쓸한 퇴장




지난 11월, 2년이 되자, 계약조건은 무시하고 ‘방을 빼라’는 공문이 날아 들었다. 이러한 서울시의 일방적 처사에 입주공장주들은 단단히 뿔이 났다. 그가 또 전면에 나섰다. 이곳 저곳, 신문고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는 공장은 다문화 이혼여성, 취약계층, 경력단절여성 등 봉제공장 취업을 위한 여성들의 취업현장 견학 및 실습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봉제취업으로 연결하여 일자리 창출을 하는 매개체 역할을 수행하며 고용 향상에 적잖은 도움을 주고 있었는데…서울시 정책을 믿고 따랐는데… 이렇게 대책없이 2년 만에 철수하라며 등 떠밀면 공장을 때려 치우란 것과 다름없다. 이대로 방을 빼면 새로운 환경에 맞게 투자한 설비와 시설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며 “필요할 때는 러브콜, 배 부르면 용도 폐기시키는 정책에 분노를 느낀다”고 호소했다.



이후 그는 서울시로부터 들은 핑계 일변도의 답변에 적이 실망했다고 한다. 봉제소공인으로 열심히 살아온 그다. 나름 배반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 그는 봉제소공인 자격으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다음날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공장을 폐업키로 결정했다. 한 쪽에선 상을, 한 쪽에선 밥줄을 걷어가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