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첫눈, 목필균

첫눈



목필균



까아만 밤에


내리는 함박눈



바라만 보아도


순결해지는 가슴 속에


기척 없이 남겨진


발자국 하나



한 겹, 두 겹, 세 겹


덮히고 덮히고 덮혀서


아득히 지워졌던 기억



선명하게 다가오는


얼굴 하나



[태헌의 한역]


初雪(초설)



誠如漆黑夜(성여칠흑야)


鵝毛從天落(아모종천락)


望則爲潔胸臆裏(망즉위결흉억리)


毫無聲息留足跡(호무성식류족적)


一層一層又一層(일층일층우일층)


積後復積埋記憶(적후부적매기억)


倏忽有一顔(숙홀유일안)


鮮然自近迫(선연자근박)



[주석]


* 初雪(초설) : 첫눈.


誠如(성여) : 진실로 ~와 같다. / 漆黑夜(칠흑야) : 칠흑같이 어두운 밤.


鵝毛(아모) : 거위 털. 함박눈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한자어이다. / 從天落(종천락) : 하늘로부터 떨어지다.


望則爲潔(망즉위결) : 바라보면 깨끗해지다. / 胸臆裏(흉억리) : 가슴 속.


毫無(호무) : 전혀 ~이 없다. / 聲息(성식) : 소리와 숨, 기척. / 留足跡(유족적) : 발자국을 남기다, 남겨진 발자국.


一層(일층) : 한 층, 한 겹. / 又(우) : 또, 또한.


積後(적후) : 쌓인 후. / 復積(부적) : 다시 쌓이다. / 埋記憶(매기억) : 기억을 묻다.


倏忽(숙홀) : 문득. / 有一顔(유일안) : 얼굴 하나가 있다.


鮮然(선연) : 선연히, 분명히. / 自(자) : 스스로, 절로. / 近迫(근박) : 다가오다.



[직역]


첫눈



정말 칠흑 같은 밤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함박눈



바라보면 순결해지는 가슴 속에


아무 기척 없이 남겨진 발자국



한 겹, 한 겹, 또 한 겹


쌓인 후에 다시 쌓여 기억 묻었는데



문득 얼굴 하나 있어


선연히 절로 다가오네



[漢譯 노트]


그 많고 많은 ‘첫눈’ 시 가운데 역자는 이 시를 골라보았다. 어인 일인지 우리나라에는 첫눈과 첫사랑을 연관시킨 시가 너무도 많다. 그런데 장석주 시인은, “첫눈이 온다 그대 / 첫사랑이 이루어졌거든 / 뒤뜰 오동나무에 목매고 죽어버려라 / 사랑할 수 있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첫사랑은 성공해서는 안 된다는 무슨 주문(呪文)을 외우는 듯한, 다소 과격한 이런 시도 기실은 우리들의 첫사랑을 더더욱 애틋이 떠올리게 하는 촉진제가 된다. 사춘기 시절에, 그 철없던 순수의 시절에 마음에 덜컥 담아버린 첫사랑의 얼굴이 잊혀졌다면, 아마도 감정의 샘이 다 말라버린 사람이거나 초연히 득도(得道)한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아련한 첫사랑의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첫눈을 보고 ‘얼굴 하나’를 떠올린 시인도 따지고 보면 ‘남겨진 발자국 하나’로 묘사한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고백한 거나 마찬가지다. 대지(大地)가 눈에 덮이듯 그렇게 여러 겹으로 세월에 덮여 아득히 잊혀졌던 기억조차 불현듯 되살아나게 하는 첫눈이야 말로 그 정체가 의심스럽다. 최면을 거는 최면술사일까? 아니면 마법을 거는 마술사일까? 첫눈을 만나면 첫눈에게 꼭 물어보고 싶다.


4연 11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한역하면서 첫 부분 2행과 마지막 2행은 오언(五言) 시구로 처리하고 가운데 7행은 칠언(七言) 4구로 처리하였다. 한역을 하기 전부터 느낀 거지만 이 시는 첫 2행과 마지막 2행만 결합시켜 읽어도 감상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그리고 역자는 이 대목을 현실의 상황으로, 중간의 7행을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일로 파악하였다.-물론 첫 2행은 현실이자 과거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한역시의 압운 역시 첫 2구와 마지막 2구를 통일시키고, 가운데 4구의 압운을 통일시키는 파격적인 실험(?)을 해보게 되었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짝수 구에 압운한 네 개의 글자가 서로 통압(通押:비슷한 운목의 글자들을 구별 없이 압운하는 일)이 허용되는 글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시의 압운자는 ‘낙(落)’·‘跡(적)’·‘憶(억)’·‘迫(박)’이다.


역자는 지금 이 순간에 오롯이 첫사랑과는 관계없는 첫눈을 생각하고 있다. 눈인 듯 비인 듯 슬며시 다가왔다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 일쑤였던 그 첫눈! 그런 첫눈을, 지는 햇살이 이따금 비쳐들던 언덕길 어느 술집에서 벗들과 함께 보며 홀로 메모했던 시상(詩想)을 떠올려본다. 아, 그렇게 세월은 가도 시상은 시로 남아 그 시절을 알게 해주니 시가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見初雪思秋冬之界(견초설사추동지계)


秋末葉紛飛(추말엽분비)


冬頭亦無別(동두역무별)


混淆何劃分(혼효하획분)


界上存初雪(계상존초설)



첫눈을 보고 가을과 겨울의 경계를 생각하다


가을 끝자락이면 잎새 어지러이 날고


겨울 첫머리 또한 다를 게 없는데


가을과 겨울 뒤섞인 걸 어떻게 나눌까?


그 경계 위에는 첫눈이 있지.



2019. 11. 26.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