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공부하고 기업체의 전산실에서 컴퓨터 관련 업무를 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인사과로 발령이 났다. 공대를 나온 사람이 인사업무를 하자니 막히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알아야 할 법과 규칙이 너무 많았고, 새롭게 제정되는 법률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인사과에서 인사관리, 노사관계, 교육훈련, 복리후생 등의 업무를 하려면,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 조정법, 고용보험법, 남녀고용평등법, 국가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장애인고용촉진법, 사내근로복지기금법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각각의 법률 밑에 정해져 있는 시행령, 시행규칙, 예규, 지침, 판례 등에 관해서도 소상히 알고 있어야 했다.

오죽하면 회사의 바쁜 일을 하는 과정에서 남모르게 몇 년씩 야간대학원을 다니면서 공부를 했으랴.



알지 못하는 지식과 해보지 않은 일을 더해가면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가장 힘든 일은 인사발령을 내는 일이었다.



매년 정기 인사발령 시기가 다가오거나, 어떤 행사나 사건으로 인해 포상을 하거나 징계를 주어야 하는 경우, 인사위원회를 거쳐 상벌을 시행하는 일이 생기면 업무적인 스트레스의 강도는 더욱 높아지고, 맡은 직무에 대한 회의감 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은 그 일을 해야만 했다.


인사발령에는 정기 승진, 특별 승진, 전근 전보, 상벌(표창, 징계), 정직, 해고, 명예 퇴직 등 다양한 형태의 인사 명령이 있다.


중요한 점은 회사에서 정한 규정과 규칙이 있고, 인사고과를 거친 고과평정 결과도 있지만, 그런 원칙과 평가결과를 바탕으로 한 숫자의 논리와 이성의 힘만으로 인사발령이 시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사발령 대상자 각자에 대한 평소의 느낌, 회사 안팎에 떠돌아 다니는 평판, 숫자로 저울질할 수 없는 인사위원회 위원들간의 평가, 해당 직무에 대한 수행 과정에서 보여 준 언행, 바로 위 상급자의 조언, 그리고 동료들간에 전해지는 소문 등이 모두 고려된다는 것이다.


이 때, 가장 평가하기 힘든 사람은 누구일까?


인사발령에서 가장 힘든 대상자는, 인사위원회 위원 중 어느 누구의 입방아에도 오르내리지 않는 사람이거나, 그 대상자의 태도나 행동에 대해 어느 것도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다.

탁월한 실력과 능력, 성실성을 겸비한 인재들은 서로 다른 부서에서 서로 빼앗아 가려고 담당 임원이나 부서장들이 난리 법석을 떨며 애를 쓴다. 어느 사람에 대해서는 말다툼과 싸움도 서슴치 않는다.

무능하고 사고를 잘 치는 골치거리에 대해서는 서로 미루며 양보를 하는 척 하면서 각 부서나 팀에서 어서 빨리 빼 가 주기를 바란다. 대상자로서는 이보다 슬픈 일이 없다.

바로 이때,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있다.

평소 착하고 성실한 것 같이 보이지만, 뭔가 판단할 수 있는 특징이 없고, 특별히 좋아서 추천을 하는 사람도 없고, 뭔가 부족해서 깎아 내릴 수도 없는, 그냥 그저 그런 사람이다.

그 일을 맡기면 얼마나 잘 해 낼수 있을 지, 정말 평소에 말하는 것만큼 잘 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건지, 대학에서의 실력과 업무 처리 능력이 같은 수준과 기대만큼 발휘 될 수 있을지 예측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일도 자신있게 맡길 수 없거나 추천을 하고 싶어도 망설여지는 사람들이 있다.



인사위원회에서 승진 전보 전근 상벌 등을 심사하는데 누구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대상자들에 대해서는 좋은 의견도 없고, 냉정한 꾸중도 없고, 고려할 사안도 없어 인사발령에 대한 제안을 내는 사람이 없다.


그런 사람은 그저 때가 되어 정기적인 발령 대상자가 되어야 비로소 인사 이동을 고려해 볼 수 있는 무난한 사람이지 “탁월한 인재”는 아니다.

위기일수록 회사는 “특출한 인재”를 필요로 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