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대낮에 응암동에 사시는 미술대학 교수님 댁을 찾아 갔다.

평생을 그림만 그리고 강단에서 강의만 하며 살아 오신 교수님 댁의 지하 창고에는 그야말로 최고의 명작이랄 수 있는 그림 수 천 점이 종이와 보자기에 쌓여 있었다. 1층 거실에도 가득 차 있었다. 조선시대 민화들도 수 천 점이 된다는 그림을 어찌 관리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묶어 놓으셨다고 한다. 불이 나면 안 된다고 전깃불도 없이 손전등을 켜 들고 골목길 찾듯이 들어 갔다.

정말 아깝고 안타까웠다. 이렇게 많은 그림과 예술 작품들이 주인공을 만나지 못해 창고에 방치된 것 같아 안쓰럽기도 했다.




5층 서재에 들어서니 한국의 역사를 보여 주는 민화(民畵)집 2천여 권을 발간하여 쌓아 놓으셨다. 대여섯 권의 책을 꺼내 주시면서 가져 가라고 하시는데 몸 둘 바를 몰랐다. 앞으로도 시대별로 수 천 권의 민화를 발간하실 계획이며, 서점에는 함부로 내놓고 싶지 않다고 하시는 고집에 내가 끼어들 재간이 없었다. 8m나 되는 누드화를 보여 주시는데 그 장대함과 세련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이 많은 작품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좋을지 몰라 걱정하고 고민하시면서도, 퇴임 후의 고독을 견디기 위해 끝없이 그림만 그리고 계신 교수님이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어느 대기업의 문화센터나 화랑에 소개해 주고 싶었지만,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야기만 하면 모두 기부만 하라 하고, 구경만 하고 다녀간 사람들은 대부분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돌아 오는 길에 건네 주시고, 직접 들어 주시는 교수님의 책은 너무나 무거웠다. 물리적인 무게가 아니라 “저 명작들을 어찌 관리하고 보존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는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함께 고민할 친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오후엔 보문동 근처 간송미술관 옆을 지날 일이 있었다. 간송미술관에 들어 가기 위해 기다리는 행렬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백 미터의 길이로 줄지어 서 있었다. 매일 그렇다고 한다. 간송 전형필 선생께서는 일제시대 일본으로 건너갈 뻔한 예술품을 찾아 오고, 잃어 버릴 뻔한 문화재를 보관하느라, 몇 대째 이어오면서 모은 재산을 다 털어 넣으셨다고 한다.


그 분께서 평생동안 수 많은 문화재와 예술품을 수집하고 모아놓은 덕분에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후대에 전해 줄 수 있는 거였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권세와 명예를 누리면서, 재산을 지키는 일만 해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저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한 학자의 땀과 눈물이 현대의 한국문화를 빛내고 있다.



얼마 전, 국악 명창의 구순 잔치에 다녀왔다. 90세가 넘으신 분이 500여 명이 넘는 제자들을 데리고 국악당에서 민요대전을 벌이신 거였다. 경기민요의 대가이신 그 분은 제자들과 함께 팔도 명창을 부르며 춤을 주고 계셨다. 아직도 더 큰 작품을 만들고 더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내실 것 같은 위엄이 작은 체구에서 배어 나왔다.



문화와 예술에 관해서는 입도 벙끗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최근 몇몇의 대가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너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된다.


문화와 예술, 음악과 미술, 스포츠와 기술 등 모든 인류 역사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기엔 눈물 어린 대가들의 땀과 피가 묻어 있고, 보이지 않는 고집과 희생이 따랐으며, 진실한 도덕과 윤리가 바탕이 되었다.



정치 경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