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L 빅6 탈퇴로 '슈퍼리그 삼일천하'…성난 팬심이 끝냈다
말 그대로 '슈퍼'한 프로축구 리그를 만들겠다던 야심 찬 청사진을 불과 3일 만에 백지에 가깝게 지워버린 것은 다름 아닌 성난 '팬심'이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의 6개 구단을 포함해 유럽의 12개 '빅클럽'은 지난 19일(이하 한국시간) 유러피언 슈퍼리그(ESL) 출범을 발표했다.

총 15개 빅클럽이 창립 구단이 되고, 매 시즌 5개 팀을 '초청'해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를 대체하는 최상위 대회를 열겠다는 게 골자였다.

미국의 투자은행 JP모건이 '뒷배'로 나서 ESL에 46억 파운드(약 7조 1천억원)를 투자하기로 했으며, ESL 우승팀 상금이 UCL 우승 상금(약 254억원)의 10배가 넘을 것이라는 현지 보도가 잇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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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L 초대 회장으로 나선 플로렌티노 페레스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회장은 "젊은 팬들이 더는 축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서 빅클럽 간의 수준 높은 대결로 관심도를 높일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축구 종가' 잉글랜드 축구팬들은 ESL이 제시하는 장밋빛 청사진을 믿지 않았다.

응원하는 팀 경기장에 '가난한 자가 만든 축구를 부자들이 훔쳐 간다'는 등의 플래카드를 걸었다.

경기가 열린 구장 앞에서는 ESL 반대 시위가 펼쳐졌다.

창립 멤버로 나선 6개 구단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울버햄프턴의 지역지 '익스프레스 앤드 스타'에서 진행한 ESL 찬반 투표에서는 96%가 반대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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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축구 팬들은 동네 조기 축구팀도 승격에 승격을 거듭한다면, 유럽 정상에 설 기회를 보장하는 '공정성'을 ESL이 침해한다고 봤다.

유럽 축구는 성적이 좋은 팀은 상위 리그로, 그렇지 못한 팀은 하부 리그로 내려가는 승강제의 '열린 피라미드 구조'를 바탕으로 돌아간다.

반면에 ESL은 15개 빅클럽에 강등 없이 독점적인 지위를 보장한다.

최근 십수년간 잉글랜드 명문 팀의 소유권을 잠식한 미국 자본을 향한 불신도 ESL 반대 움직임에 힘을 더했다.

특히, 창립 구단으로 나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리버풀, 아스널 등 3개 구단은 미국 투자가 소유다.

이들 구단의 열성 팬들은 구단주가 클럽을 '돈벌이' 정도로만 생각한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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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이 크게 목소리를 내자, 축구인들이 힘을 보탰다.

맨유 전설이자 축구 해설가인 게리 네빌은 "억만장자 구단주들은 이 나라의 축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잉글랜드에는 축구와 클럽을 사랑하는 팬들이 100년 넘게 만들어 온 역사가 있다"면서 "ESL은 역겨운 짓"이라고 비판했다.

외국인 EPL 감독들도 거들었다.

위르겐 클롭 리버풀 감독은 "(UCL 출전권을 놓고 경쟁하는) 웨스트햄이 다음 시즌 UCL에 나가는 건 원하지 않지만, 웨스트햄이 UCL에 도전할 수 있는 시스템은 좋아한다"며 승강제와 UCL 체제를 지지했다.

그는 "리버풀이라는 축구단은 그보단 나은 선택을 해야 했다"면서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팬들과 팀이다.

이들 사이에는 그 무엇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라고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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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프 과르디올라 맨체스터 시티(맨시티) 감독도 "성공이 보장된 스포츠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라며 강등 없는 ESL에 반대했다.

리버풀 주장 조던 헨더슨은 EPL 구단 주장 회의를 긴급 소집한 데 이어 리버풀 선수들을 대표해 "우리는 슈퍼리그가 싫다.

팬들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헌신을 이어가겠다"는 성명을 냈다.

팬심은 물론이고 소속 감독, 선수들의 지지마저 얻지 못한 EPL 6개 빅클럽은 결국 ESL 출범 발표 3일째인 21일 ESL 참가를 포기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창립 구단의 절반이 줄어들면서 동력을 크게 상실한 ESL이 정상 출범하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프로축구는 '팬심'으로 굴러간다는 말만 증명하고 사라질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