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6위로 출발해 6언더파
'악마의 11번홀' 버디로 승기
2위 그룹 1타 차로 따돌려
"숫자 6은 내게는 러키 넘버"
아버지가 운전하는 장애인용 자동차를 타고 어렵사리 투어 생활을 시작한 딸.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도 딸을 위해 고향(전남 순천)을 떠나 경기 용인에 새 둥지를 튼 부모. 딸은 그런 부모를 생각하며 밤샘 연습도 마다하지 않고 샷 다듬기에 열중했다. 통산 6승을 올리며 국내 무대를 평정한 딸은 미국 무대를 꿈꿨다. 하지만 망설였다. 휠체어를 타는 아버지가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는 “네가 가야 할 곳”이라며 딸의 등을 떠밀었다. 미국 진출 첫해. 딸은 여자 골프 최고 권위의 메이저대회를 제패했다. ‘핫식스’ 이정은(23) 얘기다.

이정은이 3일(한국시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CC오브찰스턴(파71·6535야드)에서 막을 내린 US여자오픈 정상에 우뚝 섰다. 단독 6위로 최종 라운드에 나서 2위 그룹을 한 타 차로 제친 역전 우승이다. 최종 합계 6언더파 278타를 적어내며 여자 골프 역대 최대 규모로 늘어난 우승상금 100만달러의 첫 주인공이 됐다. 이정은은 “US여자오픈에서 첫 우승을 달성한 것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만족하지 않고 더 노력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


‘악마의 홀’에서 승기 잡아

최종 라운드 전반은 ‘탐색’과 같았다. 타수를 줄이지 못했다. 파4로 조성된 1·2번홀에서 보기와 버디를 맞바꾼 뒤 9번홀까지 타수를 지키는 데 만족해야 했다. 10번홀(파4)에서는 위기도 맞았다. 두 번째 샷이 그린 뒤로 굴러 내려가 만만치 않은 어프로치를 남겨놨다.

그런 상황에서 집중력이 빛을 발했다. 웨지가 밀어낸 공이 깃대를 맞춘 뒤 홀 바로 옆에 멈춰 섰다. 파 세이브에 성공한 이정은에게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지은 건 ‘악마의 홀’로 불리는 11번홀(파3)에서다. 티샷한 공이 그린 프린지를 맞고 홀 쪽으로 굴러 1.2m 거리에 섰다. 이정은은 퍼트 한 번으로 공을 홀컵에 떨어뜨리며 처음 공동 선두로 올라섰다. 평균 타수 3.4381로 가장 어렵게 플레이된 홀에서 반전 드라마가 시작된 것이다.

12번홀(파4)과 15번홀(파5)에서 한 타씩 더 줄였다. 16·18번홀(파4) 보기를 범한 채 먼저 경기를 마쳤지만 경쟁자들은 타수를 잃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1타 차까지 뒤쫓던 셀린 보티에(프랑스)가 18번홀에서 친 세 번째 벙커샷을 홀컵이 외면하면서 우승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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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금 랭킹 1위로 수직 상승

이정은의 우승은 여러 면에서 값지다. 한국 선수로는 열 번째 US여자오픈 챔피언이 됐고, 신인으로는 박성현(26)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이 대회를 제패했다. 지난주 15위(35만3836달러)였던 상금랭킹은 고진영(24)을 제치고 1위로 수직 상승했다. 세계 랭킹은 지난주 17위에서 5위로 뛰어오르게 됐다.

신인상 가능성도 한층 커졌다. 이 대회 전까지 신인왕 포인트 452점으로 2위 크리스틴 길먼(미국·288점)을 크게 앞선 가운데 한번에 300점을 더해 752점을 확보했다. 이정은의 우승으로 한국 선수들은 올 시즌 13개 대회에서 7승을 합작했다.

“끊었던 라면 실컷 먹고 싶어”

이정은은 숫자 ‘6’과 인연이 깊다. 동명이인 중 여섯 번째로 프로 등록을 해 ‘이정은6’가 됐다. 큼지막하게 숫자 6을 적은 공으로 경기하기 시작한 배경이다. 국내 투어(KLPGA)에서 통산 6승을 쌓고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식스’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이번 우승도 6월에, 6언더파로 수확했다. 이정은은 “6은 내겐 러키 넘버”라며 “이 숫자로 우승해 놀랍다”고 했다.

이정은은 두둑한 보너스도 함께 챙길 예정이다. 그는 지난해 대방건설과 3년간 24억원을 보장하는 당시 국내 최고 수준의 후원 계약을 맺었다. 인센티브는 별도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이정은은 국내외 대회 우승 시 상금의 70%를 받는다. 보너스로만 70만달러(약 8억2000만원)를 추가로 챙기는 셈이다. 수십억원을 한 번에 손에 쥔 이정은은 우승상금으로 무엇을 하겠느냐는 물음에 “제가 좋아하는 게 한국 라면”이라며 “우승하면 꼭 그걸 먹어야겠다고 정해뒀다. 오랜만에 라면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소박한 대답을 내놨다.

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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