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언니’ 지은희(32·한화큐셀)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미스터리’란 얘기를 종종 들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데뷔 이듬해인 2008년 첫 승을 신고했고, 또 한 해 뒤인 2009년 코스 어렵기로 소문난 US여자오픈을 제패한 ‘유망주’가 10년이 다 돼가도록 추가 우승 소식을 알리지 못한 게 첫 번째다. 이 미스터리는 지난해 10월 풀렸다. 8년 만에 세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린 그는 “경기가 안 풀릴 때마다 스윙을 고쳤다. 그러고도 안 풀리니까 자신감을 잃었다”고 털어놨다. 두 번째 미스터리는 후원사 한화다. 한화는 2013년 후원사 없이 활동하던 그에게 손을 내민 뒤 ‘무관의 5년’을 더 보내고도 인연을 끊지 않았다. “뭔가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쑥덕거림이 흘러나왔다. 한화의 판단은 명료했다. “집념과 절실함이 보였다”는 것이었다.

제2 전성기 열어준 홀인원 적시타

‘우승 부상’ 스팅어
‘우승 부상’ 스팅어
지은희가 데뷔 11년 만에 ‘제2의 전성기’를 열어가고 있다. 26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칼즈배드의 아비아라GC(파72·6558야드)에서 끝난 LPGA 투어 기아클래식(총상금 180만달러)을 4라운드 합계 16언더파 272타로 제패하며 통산 4승째를 신고했다. 공동 2위인 크리스티 커(미국)와 리젯 살라스(미국)를 2타 차로 가뿐히 따돌렸다. 우승상금은 27만달러(약 2억9000만원).

‘홀인원 부상’ 쏘렌토
‘홀인원 부상’ 쏘렌토
홀인원을 터뜨린 최종 4라운드가 압권이었다. 11언더파 공동 선두로 최종일에 들어선 지은희는 전반에만 버디 4개를 잡아내며 추격자들을 2타 차로 밀어냈다. 6번(파3), 7번(파4), 8번홀(파5)에서는 세 개 홀 연속 버디를 쓸어담는 이른바 ‘사이클링 버디’를 선보이며 절정의 퍼트감을 과시했다.

후반 첫 홀에서도 버디 1개를 추가하며 달아나기 시작한 그는 14번홀(파3)에서 천금 같은 홀인원을 추가하며 우승 고지 9부 능선을 넘어섰다. 166야드 거리에서 7번 아이언으로 친 공이 깃대 앞 70㎝ 부근에 떨어진 뒤 홀로 빨려 들어갔다. 지은희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펄쩍펄쩍 뛰며 자신의 여덟 번째 홀인원을 자축했다. 그는 “경품을 받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지은희는 이 홀에 걸린 기아의 신형 쏘렌토(3000만원 상당)와 우승자에게 주는 스포츠 세단 스팅어(4000만원 상당)를 모두 가져갔다.

홀인원의 의미는 그 이상이었다. 마침 크리스티 커가 앞조에서 버디를 잡아내 1타 차로 쫓기던 터였다. 하지만 적시에 홀인원이 터지면서 격차가 순식간에 다시 3타 차로 벌어졌다. 이후 그는 우승을 의식해서인지 15번홀(파4)에서 3퍼트 보기를 범하는 등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대다수 버디를 잡아내는 16번홀(파4·259야드)에서도 티샷이 우측 러프로 밀렸다. 17번홀(파5)에서도 파에 그친 그는 18번홀(파4)에서 2m짜리 파퍼트를 놓치면서 후반에만 2타를 잃었다. 홀인원이 없었다면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아슬아슬한 흐름이었다.

K골프 ‘신구조화’로 두터워진 선수층

전날까지 지은희와 함께 공동 선두를 달렸던 김인경(29·한화큐셀)은 이날 2타를 줄이는 데 그쳐 13언더파 공동 4위로 대회를 마쳤다. 김인경과 동갑내기인 1988년생 이정은이 3타를 추가로 덜어내며 12언더파 공동 7위에 이름을 올렸다. ‘슈퍼루키’ 고진영이 11언더파를 기록하며 초청선수로 출전한 최혜진과 함께 공동 10위에 올랐다. LPGA 67년 만의 데뷔전 우승 루키라는 기록을 써낸 고진영은 올 시즌 출전한 5개 대회에서 뱅크오브파운더스컵(공동 46위)을 제외한 4개 대회에서 모두 ‘톱10’에 진입하는 물오른 기량을 선보였다. 오는 29일(현지시간) 열리는 메이저 대회 ANA인스퍼레이션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는 대목이다.

한국 선수들은 지난주 박인비(29)에 이어 2주 연속 우승가도를 달렸다. 고진영의 루키 우승(ISPS한다호주여자오픈)을 포함해 올 시즌 열린 6개 대회 중 절반을 가져온 50%의 승률이다.

2015년, 2017년 달성한 한 시즌 최다승(15승) 경신도 기대해 볼 만한 분위기다. 무엇보다 선수층이 두터워졌다. 지은희를 비롯해 박인비, 김인경, 이정은, 박희영, 양희영 등 1980년대생 ‘언니’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는 가운데 고진영, 박성현, 전인지, 김세영, 최운정 등 1990년대생 신참들의 기량도 서서히 올라오고 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