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어 선수 출신 "선수들 마음 너무 잘 알아"
선수·부모·코치·캐디 등과 끊임없는 대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는 요즘 '롯데 전성시대'다.

롯데 골프단 소속 장수연(22)과 김해림(27)이 2주 연속 우승을 거뒀다.

장수연이 한 달 전에 따낸 우승을 포함하면 올해 벌써 3승이다.

'롯데 전성시대'를 이끈 주역은 물론 장수연, 김해림 두 선수다.

하지만 원석이나 다름없는 두 선수를 다듬어 보석으로 바꾼 주인공은 롯데 골프단 지유진(37) 감독이다.

지난 8일 교촌 허니 레이디스 오픈을 제패한 김해림은 우승 인터뷰 기사를 보고 나서 기자에게 연락을 해왔다.

김해림은 "인터뷰 기사에 지 감독님 얘기가 빠졌는데 넣어주시면 안되나요?"라고 간절하게 물었다.

9년 동안 129개 대회를 치르면서 우승이 없던 김해림은 생애 첫 우승을 이룬 공을 지 감독에게 돌렸다.

지난달 10일 롯데마트 여자오픈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린 장수연 역시 "지 감독님 덕에 우승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 감독은 한국여자프로골프 투어 프로 출신이다.

2000년 투어 무대를 밟은 그는 2004년 SBS최강전 우승으로 챔피언의 반열에 올랐다.

2012년 은퇴하자마자 당시 하이마트 골프단 감독을 맡았다.

하이마트가 롯데에 인수되면서 롯데 골프단 감독이 됐다.

지금 롯데 골프단에는 올해 우승한 김해림과 장수연 뿐 아니라 김지현(25), 김현수(24), 권지람(22), 이소영(19), 하민송(20), 그리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김효주(21) 등 모두 8명이 소속되어 있다.

투어 프로 출신이기에 지 감독은 누구보다 선수들 마음을 잘 안다.

지 감독는 선수들에게 '맏언니'이자 '엄마'이면서 '친구'다.

샷 점검이나 기술적인 조언도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선수들 마음을 읽는 일이다.

지 감독은 "선수들과 많은 대화를 한다"고 말했다.

얼굴을 마주 보고 나누는 대화 뿐 아니라 카톡이나 전화로 수시로 선수들과 대화를 나눈다.

투어 프로 선수들은 사실 많이 외롭다.

1년 내내 대회 출전하고 훈련하느라 친구를 사귈 짬이 없다.

부모나 형제자매에게도 털어놓기 싫은 일도 더러 있다.

이런 선수들이 속마음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 상대가 지 감독이다.

지 감독은 "얼굴만 봐도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된다"고 웃었다.

지 감독은 또 선수들에게 쓴소리도 서슴지 않는다.

선수들이 받아들이리라 믿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시절 초청선수로 출전한 프로 대회에서 잘못된 룰 적용 탓에 벌타를 받아 우승 기회를 놓친 불운의 주인공 장수연은 프로 선수가 되어서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4년 동안 우승 기회가 적지 않았지만 가슴이 졸아들거나 샷이 헝클어진 바람에 다른 선수의 우승 세리머니를 지켜봐야 했다.

롯데마트 여자오픈을 앞두고 제주 현지에서 장수연과 오랜 대화를 나눴다.

지 감독은 "넌 이미 우승할 (기술적) 준비가 다 되어 있다"면서 "하지만 경기가 안 풀릴 때 참을 줄 알아야 우승할 것"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장수연은 "감독님 말씀을 듣고 문득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이젠 달라져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줄곧 지켜보던 지 감독의 조언은 타이밍이 딱 들어맞았다.

김해림 역시 챔피언조에서 경기할 때면 퍼트가 짧아지는 경향이 심했다.

저절로 샷과 퍼팅이 위축되면서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지 감독은 "네가 뭐가 모라자서 우승을 못 하냐"고 김해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프로 무대를 밟은 지 6년 만에 어렵게 첫 우승을 일궜던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과 충고에 김해림은 용기를 얻었다.

교촌 허니 레이디스 오픈에서 우승한 뒤 김해림은 "감독님 말씀이 큰 힘이 됐다"고 밝혔다.

어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조언이지만 지 감독의 말이 선수들에게 마음의 변화를 끌어내는 원동력은 신뢰감이다.

이런 신뢰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지 감독의 스케줄은 선수보다 더 빡빡하다.

대회가 열리면 공식 연습일과 프로암 때도 현장에 출동한다.

대회 기간은 더 집중적으로 선수들을 보살핀다.

선수들을 따라 다니며 살펴본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대책을 만든다.

대책 가운데 장기 과제는 따로 챙겨두고 현장에서 곧바로 대처할 일은 그때그때 시행한다.

선수 스윙 뿐 아니라 신체적 컨디션, 심리 상태, 크고 작은 부상, 연습, 식사, 휴식 등등 모든 걸 꼼꼼하게 점검한다.

이렇게 하면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골프장에서 살아야 한다.

골프장에서 지 감독은 잠시도 앉아 있을 틈이 없다.

7명의 선수를 모두 살피러 다니려면 18홀 코스를 끊임없이 누비야 한다.

월요일에는 사무실에 출근해서 보고서를 만든다.

쉬는 날은 화요일 하루뿐이지만 '휴일'도 선수들과 전화통화나 카톡으로 수다를 떨며 보내기 일쑤다.

지 감독은 캐디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작년에는 넉달 동안 김해림의 백을 멨다.

소속 선수 가운데 지 감독이 캐디를 해주지 않은 선수가 없다.

"캐디를 하면 선수를 더 잘 파악할 수 있기에 요청하면 늘 응했다"는 지 감독은 "그런데 솔직히 너무 힘이 부쳐서 올해는 못하겠더라"고 털어놨다.

이렇게 바쁘고 힘든 일이지만 지 감독은 "선수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게 체질인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지 감독이 이끄는 롯데 골프단은 '골프 대디'와 관련된 갈등이나 말썽이 없기로 유명하다.

한국여자프로골프투어에는 '골프 대디'는 매우 민감한 존재다.

지 감독은 선수 부모, 그리고 선수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코치, 캐디와도 대화를 많이 나눈다.

지 감독은 "선수가 내는 성적은 부모, 코치, 트레이너, 캐디, 스폰서, 매니저 등 수많은 사람이 힘을 합친 결과"라면서 "그런 조화를 끌어내려면 소통과 신뢰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맏언니' 지 감독은 살뜰하게 선수들을 뒷바라지하지만, 선수가 외모 꾸미기에 열중하는 건 참지 않겠다고 한다.

"투어에서 정상에 서고, 살아남으려면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지 감독은 "소소한 것이라면 몰라도 지나치게 외모를 꾸미는 선수는 그런 에너지가 분산될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다행히 우리 팀에는 그런 선수가 없지만 만약 있다면 엄청나게 혼을 낼 것"이라고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친김에 지 감독은 요즘 한국여자프로골프투어에서 만연한 '외모 마케팅'에도 돌직구를 날렸다.

그는 "롯데 골프단은 절대 외모를 선수 선발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서 "실력보다는 예쁜 선수만 선호하는 후원 기업이 많아질수록 우리 투어의 경쟁력은 저하되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지 감독은 "사실 롯데 골프단도 외모를 보고 선수를 뽑아야 한다는 '압력'이 없지 않았다"면서 "잘 설명을 해서 실력과 인성, 발전 가능성을 가장 중요하게 보고 선발하는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다"고 자랑했다.

특히 지 감독은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선수를 데려다 챔피언으로 성장시키는 쪽을 선호한다.

'미생'에서 '완생'으로 성장하는 김해림과 장수연이 그런 선수다.

지 감독은 다른 선수들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우리 선수들 우승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좋을 수 없다"는 지 감독은 "원래 좋은 재목들이니까 내가 어떻게 뒷바라지하느냐에 달린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권훈 기자 kho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