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 수 있다는 최면 걸어.."최고의 제자를 만들고 싶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마스크가 멋있다'는 이유로 포수가 됐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2009년. 야구만 알고 살아온 그 남자가 지난 24일 오후 잠실구장 더그아웃에서 야구인생 최고의 순간을 맛봤다.

조범현(49) KIA 감독이다.

선수들과 고락을 나눈 광주구장에서 사복 차림으로 만난 조 감독은 한결 여유를 찾은 표정이었다.

조 감독은 "주축 선수들이 빠진 SK에 지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며 "시리즈 내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7차전에 걸친 SK와 혈전을 만족스럽게 되돌아봤다.

'한국시리즈 우승팀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단 조 감독은 이어 "마지막 두 경기를 치를 때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잘 잤다"고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이 미소를 짓기까지 조 감독은 고된 길을 지나야 했다.

쟁쟁한 스타를 숱하게 배출한 '전통의 명가' 타이거즈에 해태와 인연이 없는 조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것부터가 고생길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2007년 10월 조 감독이 부임할 때 KIA는 꼴찌였다.

2005년에도 꼴찌를 하는 등 과거의 영화는 사라진 채 바닥권을 맴돌며 지리멸렬한 팀이었다.

더욱이 조 감독은 선수 시절 화려한 성적을 내지도 못했고 고향도 대구다.

자존심과 텃세가 강한 호남의 호랑이 군단을 지휘하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부임 첫해 6위로 마친 조 감독은 선수들에게 팀플레이를 강조했다.

계약 기간은 올해로 끝나는 상황이었지만 급하게 마음을 먹지 않고 팀의 체질을 바꾸는데 애를 썼다.

결국 시즌 막판 KIA는 1997년 우승 후 10년 넘게 잠자고 있던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8월 초 단독 1위로 나섰고 정규리그 1위에 올랐다.

특히 조 감독은 한국시리즈에서 고등학교(충암고), 프로야구(OB)에서 감독으로 모셨던 김성근 SK 감독을 상대로 '사제대결'을 펼쳤다.

2승 후 2패를 당하며 몰렸지만 스승을 뛰어넘는 뚝심과 지략을 펼쳐 감격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다음은 조 감독과 일문일답.
--우승하고 누구와 먼저 기쁨을 나눴나.

▲우승 직후 딸, 와이프와 통화했다.

'고생했다'고 하더라. 그 후 인천의 집에 가 있었다.

이번 시즌에서 두 번째로 갔는데 무척 어색하더라.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가진 부담은.
▲두 가지였다.

타이거즈는 그동안 한국시리즈에 9번 나가서 다 이겼다.

혹시 내가 과거 선배들의 기록에 흠을 남기지 않을까 부담이었다.

또 주축 선수들이 빠진 SK에 지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시리즈 때 가장 크게 한 고민은.
▲1, 2선발의 순서였다.

윤석민을 1선발로 쓰고 싶었는데 부상 때문에 감각이 떨어진 상황이라 한계가 있을 것으로 봤다.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던지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해 2차전으로 돌렸다.

아킬리노 로페즈는 이번 시즌 큰 무리 없이 잘 던졌고 상대와 성적도 좋았기 때문에 1선발로 냈다.

--7차전 5-5에서 9회말 공격에 들어갈 때 심정은.
▲동점이니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SK가 투수를 많이 써 버렸기 때문이다.

1-5로 뒤질 때는 잠시 어려워지는 것 아닌가라고 의심하기는 했다.

그래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후반에 점수를 낸다고 생각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6차전을 내주고 나서다.

사실 6차전에서 끝낼 계산이었다.

6차전에서 패하면서 선수들이 당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의 기운이 타이거즈를 감싸고 있다'는 등 자신감 넘치는 코멘트를 한 배경은.
▲선수들이 경험이 부족하고 성향이 부드럽다.

전술적인 부분을 보완하는 것보다는 집중력과 자신감을 키워야했다.

위축되는 부분을 없애야 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최면을 걸자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SK는 무서울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사실 누구나 '지면 어떡하나.

지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나 자신부터 불안한 요소를 없애야 했다.

나도 마인트컨트롤을 했다.

이기는 상황을 머리에 그렸다.

연초에 길몽을 꾼 것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사실 나는 운명이나 기운을 믿는 편은 아니다.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명장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다.

▲사실 페넌트레이스에서 우승한 것만도 값지다.

만약 KIA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했다면 페넌트레이스의 우승도 묻혔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아쉽다.

우승을 못하더라도 팀과 선수들의 노력은 인정해 줬으면 좋겠다.

김경문 두산 감독은 얼마나 팀을 잘 만들었고 한국야구를 잘 이끌어왔나.

하지만 우승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제대로 평가가 이뤄지지 않아 아쉽다.

--SK는 어떤 부분이 상대하기에 까다로웠나.

▲불펜진을 공략하는 포인트를 찾기가 어려웠다.

왼손투수도 부담이었다.

야수도 스피드가 넘쳤다.

타자도 파워가 있고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몰랐다.

--시즌 초 팀 전력을 어느 수준으로 평가했나.

▲스프링캠프 때 우승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을 했다.

내 재계약을 염두에 두고 팀을 운영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6인 선발 투수 체제를 유지하고 팀을 정비하면서 어린 선수들을 육성하는데 포커스를 맞췄다.

때마침 선수들도 실력 이상으로 잘 해줬다.

--시즌 초 구단에서 자유계약선수(FA) 영입 이야기를 꺼냈을 때 거절했다.

▲FA 한 명이 온다고 해서 팀이 우승할 수 있는 전력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2~3년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워서 운영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봤다.

스프링캠프 때 속으로 '이렇게 계획하다가 안되면 집에 가면 되지'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마음먹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선수의 인생이 걸린 문제니 책임감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선수들에게 어떤 부분을 강조했나.

▲바깥 팬들이 '타이거즈는 모래알이다', '근성이 없다'는 말을 했다.

우리 팀이 왜 이런 말을 들어야할까라고 고민했다.

파악해보니 선수들에게 개인적인 성향이 있었다.

팀이 이기고 지는 것과는 관계없이 자기중심적이었다.

이러면 이길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팀이 먼저라는 생각을 하게끔 강조했고 지금도 강조하고 있다.

이제는 선수들이 서로 격려하고 아낀다.

많이 좋아졌다.

--조범현의 야구는 어떤 야구인가.

▲과거의 해태는 홈런을 많이 쳤고 투수력도 좋았다.

조화가 잘 이뤄졌다.

그런데 야구에서 홈런을 몇 개씩 치고 완봉승을 하는 경우는 몇 경기 안 된다.

작은 플레이에서 승패가 갈린다.

우리 선수들이 그 부분에 공부가 덜된 것 같아서 강조했다.

앞으로도 강조할 것이다.

전력 분석과 데이터는 기본적으로 참고한다.

나와 과거의 코칭스태프와는 성향부터 차이가 있다.

--스타 출신이 아닌 감독으로 겪은 어려움은.
▲나는 선수 시절 화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코치가 될 때 '골든글러브 등 내가 선수 때 못 이룬 것들을 제자는 꼭 받게 하겠다.

최고의 제자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처음 코치가 됐을 때 경기가 끝나고 매일 차트를 연구했다.

물불을 안 가렸다.

나 스스로 놀랄 정도로 열심히 했다.

경기를 마치면 차트를 정리하는 데 1시간 반에서 2시간이 걸렸다.

밀리면 다음날 세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공 하나의 구질과 코스를 모두 복기했다.

수작업으로 꾸준히 했다.

그것을 모아서 선수에게 접근하면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삼성 코치(2000~2002년) 때 기록 전산화가 이뤄졌는데 그 전까지 계속 손으로 작업했다.

손으로 작업하면 잘 기억할 수 있다.

포수 박경완에게 특정 상황에서 어떤 투구였는지 물어봤다가 대답하지 못하면 혼냈다.

포수에게는 기억력이 중요하다.

자신의 생각대로 해서 성공한 경우, 상대 타자의 특별한 부분까지 모두 기억해 놔야 한다.

--김성근 감독에게 배운 점은.
▲야구의 흐름 등 여러 가지를 배웠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좋았던 기억은 없다.

훈련으로 시작해서 훈련으로 끝난 기억밖에 없다.

(웃음)
--김성근 감독의 스타일을 아는 것이 이번 시리즈 때 도움이 됐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김성근 감독님을 대할 때 뿐만은 아니다.

상대 벤치의 성향은 늘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김성근 감독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나.

▲야구를 시작하며 배웠으니 여러 부분에 영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코치 생활을 10년간 하면서 나름대로 야구 철학과 팀 관리 방법 등을 만들었다.

SK와 KIA의 투수 운영을 봐라. 극단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아니다.

감독의 역할은 선수의 성향과 기량 수준을 파악해 팀에 맞게끔 합리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데 있다는 뜻이다.

--내년 시즌은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현재 우리 팀의 전력은 내가 생각한 수준의 70% 정도다.

물론 내년에도 최종 목표는 우승이다.

하지만 우승에 앞서 새로운 비전을 갖고 운영할 것이다.

리빌딩을 잘해서 늘 상위권에서 움직일 수 있는 팀이 돼야 한다.

리빌딩도 한 번에 하기보다는 단계적으로 2-3년에 걸쳐 하는 게 바람직하다.

불펜진은 사실상 손영민, 곽정철뿐이다.

불펜진이 더 필요하다.

왼손투수도 필요하다.

우리 팀은 '무겁다.

못 뛴다'는 말을 듣는데 팀의 스피드도 높이고 싶다.

--'한일 클럽 챔피언십'이 내달 14일 열리는데 주축 선수들이 빠진다.

▲나도 그게 걱정이다.

여기에 김상현도 출장이 불투명하다.

한국시리즈 때 슬라이딩하다가 손가락 인대를 다쳐 치료해야 한다.

11월1일부터 남해 캠프에서 본격적으로 준비를 할 것이다.

--이번 시즌 이종범과 이대진을 중용했다.

▲2007년 와서 이종범을 보니까 근력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단지 연습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종범은 지난 2년 동안 스프링캠프에서 하루도 안 쉬고 열심히 했다.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우선적으로 기회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즌 때는 타석에서 희생을 하면서 팀배팅을 했다.

팀을 모으게 했다.

말보다 행동을 하는 선수다.

자기 역할을 잘했다.

이대진은 수년간 시련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정말 자기 관리를 열심히 한다.

마운드에 서려는 열정이 있다.

의지와 열정을 후배들이 보고 배우라는 심정에 마운드에 올리기도 했다.

후배에게 모범이 된다.

(광주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coo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