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나 장은 오래 숙성되면 깊은맛을 낸다.

스포츠 기록도 오래도록 깨지지 않으면 그만큼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것도 희소성이 있을 때 성립되는 말이다.

육상 한국기록 현황표를 들여다보면 이런 논리는 쉽게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왜 이렇게 장기간 깨지지 않고 있을까 걱정과 조바심만 앞선다.

워낙 '묵은 기록'이 많기 때문이다.

30년 묵은 남자 100m 한국기록(10초34) 경신이 한국 육상의 당면 과제이자 가장 오래된 숙제로 남아 있지만 트랙 부문에서는 다른 기록도 사정이 비슷하다.

◇묵을대로 묵은 트랙 기록 = 한국기록을 인증하는 트랙 종목이란 허들, 장애물, 계주를 포함해 모두 12개 부문으로 100m, 200m, 400m, 800m, 1500m, 5000m, 10000m, 3000m장애물, 110m허들(여자는 100m허들), 400m허들, 400m계주, 1600m계주를 말한다.

이 가운데 남자부에서 2000년대 한국기록이 깨진 종목은 이정준(안양시청)이 지난해 대구국제육상대회에서 갈아치운 110m허들과 지영준(경찰대)이 2006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세운 5000m뿐이다.

장재근이 보유한 200m(20초41)는 24년 묵었고 400m와 800m도 1994년 세워져 올해로 15년째가 됐다.

1500m는 16년 묵었고 트랙 최장거리 10000m 한국기록도 23년이나 지났다.

3000m장애물 기록도 19년째 깨지지 않고 있고 400m허들도 1990년 수립됐다.

최근 릴레이팀을 구성한 400m계주도 서울올림픽 때 나온 이른바 '88 기록'이다.

여자부가 조금 낫기는 하지만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100m 기록(11초49)이 15년 지났고 200m는 23년째 요지부동이다.

800m도 22년 전에 나온 기록이다.

한국기록 뿐만 아니라 부별 기록들도 적잖이 '묵은 장맛'을 낸다.

남자 초등학교 80m 기록은 1987년 세워져 지금까지 난공불락이다.

초등부 100m 기록도 16년째 그대로이다.

지난 4일 대구에서 펼쳐진 전국육상선수권대회에서 이선애(대구 서남중)가 세운 여자 중등부 100m 신기록(11초88)은 23년 만에 0.11초를 단축한 것이다.

남자 세계기록은 우사인 볼트(자메이카)가 작년 베이징올림픽에서 100m와 200m, 400m계주를 한꺼번에 깨트리는 등 12개 중 7개 부문에서 2000년대에 새 기록이 나왔다.

◇왜 깨지지 않을까 = 육상인들은 1980∼90년대는 '저변'이 달랐다고 말한다.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초, 중반에는 대다수 아마추어 선수들이 일단 육상을 먼저 시작한 다음 다른 종목으로 옮겨가는 풍토가 있었다.

1980년대 학창시절 선수로 뛰었던 김정식 대한육상경기연맹 경기팀장은 "정확한 통계는 남아있지 않지만 등록 선수가 1만명 가까이 됐다"며 "특히 단거리는 지금보다 선수들이 훨씬 많았다"고 말했다.

1980년대 중반 전국종별육상선수권대회를 열면 고등부 100m가 20조까지 편성됐다고 한다.

한 조에 8명씩 뛰면 160명이나 참가한 셈이다.

현재는 많아야 8, 9조 정도만 뛴다.

기껏해야 70∼80명이 레인에 서는 셈이다.

최근 국내 육상대회 중 가장 규모가 큰 종별대회 참가 선수는 1천700명 선이다.

1980년대에는 3천명을 넘긴 때가 잦았다.

하지만 과학적인 훈련 방법이나 스파이크 등 장비는 훨씬 좋아졌다.

국가대표들의 훈련 여건도 20여년 전보다는 나아졌다.

◇기록 보유자들의 고언 = 남자 800m 한국기록을 15년째 보유하고 있는 이진일 코치는 "선수들의 정신력이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코치는 "1990년대 초반에는 기록을 깨지 못하면 너무 억울해서 레인에 털썩 주저앉아 우는 선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후배들을 찾아볼 수 없다.

한마디로 정신력이 너무 약하다"고 지적했다.

1985년 수립된 남자 200m 기록을 갖고 있는 장재근 육상연맹 이사도 "물적 지원이나 스포츠 과학의 도움 등 여건은 좋아졌지만 열정은 식었다.

선수와 지도자 모두 안 되면 될 때까지 한다는 열정이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30년 묵은 100m 한국기록 보유자 서말구 해군사관학교 교수도 "훈련 방법은 세계기록 보유자인 볼트와 우리 대표 선수들이 다를 것이 없다"면서 "관건은 원대한 목표를 잡고 장기적으로 체계적인 훈련을 소화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옥 철 기자 oakchu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