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한국은 졌다. 그러나 지지 않았다. 전광판의 숫자는 숫자일 뿐이다. 우리에겐 태극전사들이 흘린 피와 땀이 남아 있다. 월드컵 첫승, 16강, 8강, 그리고 4강. 신기원은 차례로 열렸다. 비록 결승 문턱을 넘지 못했지만 그것은 내일을 위해 남겨진 것. 태극전사들은 잘 싸웠다. 넘어지고 차이고, 찢겨도 기꺼이 일어났다. 그것은 정녕 혼신을 다한 힘이었다. 한국의 저력이었다. 경기마다 사력을 다한 태극전사들을 전 국민은 기억할 것이다. 그 기억 속에는 붉은악마가 뜨겁게 외쳤던 함성이 살아 있다. 그리고 4천7백만 국민이 하나가 됐던, 가슴 벅찬 감동이 물결치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희망을 가진 승리자다.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강호 독일과의 준결승전. 전차군단을 맞은 태극전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했다. 이번 대회 처음 선발로 출장한 이천수의 날카로운 슛이 유럽 최고의 골키퍼라는 올리버 칸의 손에 걸려 골대를 아깝게 빚나가는 등 전반 초반은 한국의 공격이 빛을 발했다. 그러나 고공플레이를 앞세운 독일의 파상 공세는 한국 골문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홍명보 김태영 등 수비수들은 머리 하나가 더 큰 독일 공격수들을 온 몸으로 저지하며 사력을 다해 골문을 지켰다. 일진일퇴의 공방 끝에 전반전은 0-0 무승부. 후반 들어서도 한국의 공간침투와 독일의 고공플레이가 불꽃을 튀며 충돌했다. 큰 키를 이용한 독일의 공격은 날카로웠다. 황선홍 대신 들어간 안정환이 이천수 차두리와 함께 빠른 발로 독일 수비진을 교란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은 계속됐다. 균형이 깨진 것은 후반 29분. 한국의 공격을 막아내던 독일이 날카로운 역습으로 우리 골문을 갈랐다. 0-1. 태극전사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수비의 핵인 홍명보를 빼고 공격수 설기현을 투입하는 초강수로 맞섰다. 그러나 끝내 승리의 여신은 한국에 미소짓지 않았다. 태극전사들에게는 너무도 아쉬운 한 판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상암 월드컵경기장에 모인 6만명의 관중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한 태극전사들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한편 서울 광화문과 시청을 비롯한 전국은 또다시 붉은 함성이 물결치는 장관을 연출했다. 시청앞과 광화문 등 서울에서만 3백만명이 넘는 인파가 거리로 나와 가슴 졸이며 한국팀을 응원했다.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 7만명 등 전국에서 7백만명 가까운 인파가 집단 응원을 펼쳤다. 조주현 기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