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18일 대전 한밭경기장. 한국 축구는 새로운 역사를 또 써냈다. 월드컵 8강 진출. 더 이상 첫승에 목말라하던 한국대표팀이 아니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우승후보들도 '종이호랑이'로 만들어 버렸다. 한국대표팀은 지금 16강, 8강 고지를 차례로 점령하며 '불패(不敗)의 신화'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한국에 있어 월드컵 본선 48년의 역사는 좌절의 역사였다. 지난 54년 스위스월드컵 본선에 처음 진출했을 때 한국은 '놀이개감'에 불과했다. 헝가리에 0-9, 터키에 0-7패배.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하고, 시차라는 개념도 잘 몰라 경기시작 직전에 스위스에 도착했던게 당시 한국대표팀이었다. 한국전이 끝난 직후라고 하지만 그렇게 한국대표팀과 한국은 어수룩했다. 스위스 대회 후 지난 86년 한국대표팀은 월드컵 본선 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90년 이탈리아, 94년 미국, 98년 프랑스대회까지 4회 연속 본선에 진출했다. 그러나 단 한차례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4무8패. 아시아에서는 맹주를 자처했지만, 세계강호들과 맞서면 얼어붙어버려 비웃음만 사곤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8강진출은 이런 점에서 정말 값진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승후보인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을 제쳤다고 해서만은 아니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나라는 32개국. 하지만 월드컵 본선에서 뛰기 위해 지역예선전을 벌였던 국가는 모두 1백95개국이다. 그러니까 한국은 1백95개 나라중 8강에 들어간 셈이다.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렇다고 한국의 8강 진입을 한풀이로만 규정할 수 없다. 이를 계기로 '주식회사 한국'의 경쟁력은 한단계 업그레이드될게 분명하다. 'Korea'라는 브랜드는 월드컵 16강과 함께 세계인들의 머리 속에 깊숙이 각인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외국 언론들은 한국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월드컵을 개최한데 이어 무패의 전적으로 16강에 진입한 것은 전후 폐허를 딛고 경제적 부흥을 이룬 '한강의 기적'이 축구에서 재현된 것이라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또 한국의 붉은악마는 단순한 응원의 차원을 넘어선 지역 계층간 대통합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지역, 학력 등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갈등구조는 적어도 월드컵 앞에서는 존재하지 못했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나이를 뛰어넘어, 성별에 관계없이 일체감을 형성했다. 그리고 함께 '대~한민국'을 외쳤다. 응원은 열광적이었지만, 이것은 지극히 평화적이었고 질서정연했다. 훌리건에 익숙한 외국언론은 동원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보냈다. 소란은 커녕 응원할 때 버려진 쓰레기를 깨끗이 치우고 자진해산하는 성숙한 응원문화에 대해선 외국인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월드컵을 통해 전세계에 결코 작위적이지 않은, 그러나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줬다. 붉은악마 신인철 대표는 "눈앞의 목표에만 급급하고 결과만을 외쳐대던 우리에게 이번 월드컵은 최선을 다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며 "사상과 종교, 지역과 빈부차가 '대한민국'이라는 용광로속에 녹아들어 하나됨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서울 삼성동에서 오퍼상을 하고 있는 이동준씨(31)는 "월드컵이 열리고 한국이 좋은 경기를 펼치면서 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상이 매우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며 "이번 월드컵이 일회성 행사가 되지 않고 경제대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도록 온국민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주현 기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