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운 한판이었다. 전반 23분 매시스의 첫골과 후반 32분에 터진 안정환의 만회골,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우리 선수들은 사력을 다했지만 미국의 골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고, 경기는 결국 무승부로 끝났다. 이 경기를 보기 위해 대구로 내려오는 동안 마음이 그다지 편치는 않았었다. 결전의 날을 맞이한 긴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미국의 전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해 보였다. 포르투갈이 예상대로 미국을 잡아 주었더라면 16강 진출을 위한 우리 대표팀의 행로는 좀더 간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포르투갈이 미국에 패하면서 사정이 복잡해졌다. 게다가 미국의 승리는 온전히 미국의 실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어느 정도는 승운이 따라준 결과였다. 그러니 우승 후보로까지 손꼽혔던 포르투갈을 물리치고 승점 3점을 확보한 미국의 전력도 문제지만, 첫 게임을 놓치고 예선 탈락의 위기에 몰린 이베리아의 표범 포르투갈이 발톱을 세우고 덤빌 일도 문제였다. 월드컵 첫승의 감격이 채 식기도 전에 찬물을 뒤집어쓴 꼴이었다. 하지만 대구 경기장에 가까워지면서부터 내 마음의 분위기는 돌변하기 시작했다. 경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관중석을 가득 메우고 있는 6만의 붉은 악마들, 그들이 내뿜는 열기는 6월 한낮의 때이른 더위를 무색케 했고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나를 형언하기 어려운 기묘한 감동으로 사로잡았다. 이 놀라운 열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단순한 애국심이나 스포츠 내셔널리즘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러나 6만의 관중 모두는 이심전심으로 공감하고 있는 그 어떤 열망의 표현이었다. 새삼 부산 경기장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경기가 끝난 후의 스탠드의 모습이었다. 미친 듯한 열기로 휩싸였던 곳임에도 스탠드는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 스탠드의 모습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당당하고 버젓한 모습이라고, 정직한 승부를 위한 땀과 눈물이고 그 결과로 획득하는 당당한 승리라고. 경기가 시작되자 우리 대표팀 선수들은 관중들의 뜨거운 응원 속에서 상대를 압박하며 경기를 주도하기 시작했으나, 젊고 빠른 공격수들을 앞세운 미국 팀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순간 순간 터져나오는 송곳 같은 전진 패스와 센터링, 상대 공격을 차단하는 멋진 슬라이딩 태클과 거친 몸싸움, 폭염 속을 질주하는 선수들의 힘과 뛰어난 기량이 어우러지며 경기장은 육체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일대 경연장이 되었다. 후반에 터진 안정환의 헤딩골은 멋진 작품이었지만, 페널티킥의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분전해준 이을용의 플레이도 돋보였고, 90분 내내 전방을 휘저으며 찬스를 만들어낸 설기현의 선전도 눈부셨다. 16강 진출을 위한 복잡한 경우의 수 같은 건 따지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오늘도 우리 선수들은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도 주눅들지 않은 채 자신의 게임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이번 게임을 통해 확인한 소중한 성과다. 승리를 얻지 못한 것은 완벽을 위한 마지막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한발의 화살이 남아 있다. 14일 금요일 우리의 자랑 태극전사들의 선전을 믿는다. <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