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서울 시청 앞이다.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인 2시30분, 서울은 어느새 빗줄기가 굵어진다. 그런데도 이 거리는 벌써 인파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아니, 비가 내리지 않아도 이미 붉은 물결의 거대한 강이다. 빗속에 강이 흐르고 함성이 흐르고, 우리 가슴을 두드리듯 응원의 북소리를 울리고 있다. 대구, 그곳에도 지금 비가 내리고 있는가. 오늘 미국과의 경기가 열리는 대구 월드컵 경기장뿐 아니라 온나라가 거대한 응원장이며 전국적으로 80여곳에 이런 대형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 내가 나와 있는 시청 앞 일대에도 여러 곳에 대형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다. 대체 이곳에 모인 인파가 얼마나 될까. 문득 그 수가 궁금해진다. 이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던 것은 내 기억에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지금부터 꼭 15년 전인 1987년 6월, 이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지금의 응원처럼 민주화를 외쳤다. 연일 사람들이 터져 나오고, 곳곳에 최루탄이 난무하던 그 거리에서 세계인의 축구 축제를, 그것도 바로 우리 한국과 미국전을 바라보는 감회 어찌 새롭지 않으랴. 오늘이 바로 그날, 6월10일이 아닌가. 3시30분.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선수들의 한 동작 한 동작에 관중들은 환호한다. 아니 거리가 살아 함성을 지른다. 그러다 우리가 먼저 실점했을 때 비명처럼 탄식소리가 흘러나온다. 함성과 탄식 속에 우리에게도 기회가 왔다. 황선홍 선수가 얻은 패널티킥을 이을용 선수가 차는 순간 거리는 문득 한 순간의 정적에 휩싸였다. 이어 다시 긴 한숨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굵어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사람들은 우산도 받지 않은 채 이마에 흐르는 빗방울을 훑어내며, 다시 합창처럼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친다. 이 응원의 함성을 들었을까. 안정환 선수의 황금 같은 만회골이 터진다. 그 순간, 그것은 함성이 아니다. 차라리 하늘을 가르는 천둥소리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이 열기 이 함성 그대로 우리 대표팀을 응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