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역사가 이뤄졌다. 전반 27분 이을용의 패스를 받은 황선홍의 슛이 터지는 순간 한국 축구 48년의 기원이 천둥처럼 번개처럼 현실이 됐다. 새 역사의 도래를 알리는 유상철의 축포가 연이어 터졌다. 월드컵 전적 4무10패 끝에 1승의 염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 소리와 함께 선수들은 얼싸안고 그라운드에 쓰러졌고,펄쩍펄쩍 뛰며 내지르는 관중들의 환호성으로 부산 구장은 그대로 한 척의 비행선이 돼 지상으로부터 솟아올랐다. 그냥 그렇게 하늘로 비상해 버려도 좋을 환상적인 밤이었다. 직경 22㎝의 둥근 주사위,축구공이 연출하는 마술이었다. 지난 16년 동안 우리는 멕시코와 이탈리아,미국과 프랑스에서 거듭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월드컵 시즌이 다가오면 지면을 도배하던 장밋빛 환상과 결의,하지만 막상 큰 무대에 오르면 다리가 얼어붙어 버린 듯 허둥거리며 실수를 연발하던 선수들과 그들을 지켜보아야 했던 참담함,그리고 이어지는 거대한 집단 망각. 이 공포의 사이클은 우리 모두의 과실이었다. 국가대표팀의 경기에는 온 나라가 법석을 떨면서도 정작 국내 프로리그에는 싸늘하기만 했던 언론과 관중들,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핵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했던 관계자들. 모든 것이 사회적 성숙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은 달랐다. 우리는 이 거대한 축제의 주인이었다. 대표팀을 향한 성원은 뜨거우면서도 은근했고,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선수들도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부산 구장을 질주하는 우리 선수들은 침착하고 냉정했으며,빠르고 강했다. 우리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동안 훈련을 통해 다진 능력을 있는 만큼만 발휘해주는 것,프로로서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진정한 프로가 무엇인지를,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 일깨워줬다. 20세기 세계사의 변방에서 언제나 피해의식과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우리의 처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의 성장을 인정받거나 과시하고 싶어했고,그래서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했다. 우리는 선수들이 어떤 훈련을 통해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는지를 지켜봐 왔다. 성실하고 체계적인 준비만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원천이라는 것,지금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성장이 아니라 성숙이라는 것,광적인 애국심이 아니라 냉철한 자긍심이라는 것,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시선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승리의 기쁨이 잦아 들어가는 운동장 스탠드에서 이 글을 쓰며 나는 행복했다. 5만 붉은 악마들의 뜨거운 함성 속에서 매순간 그들은 단 한번의 아름다운 패스와 완벽한 슈팅을 위해 뛰었다. 남은 게임에서도 그들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축구 자체를 위해,자기 자신의 환희와 희열의 순간을 위해,프로로서의 자긍심을 위해 뛰어줄 것을 믿는다. 그것에 비하면 16강도 애국심도 하찮은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자존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감독과 선수들에게 내 아내를 대신해 뜨거운 키스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