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가사키의 색깔은 여러가지다. 단단할 것만 같은 문화의 속살엔 다단한 이국의 내음이 고루 배어 있고, 천혜의 자연속엔 원자폭탄과 화산폭발 등 대형참사의 그늘이 드리워 있다. 알듯 모를듯 팔색조 느낌은 아니다. 여러 겹 껍질 속엔 또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게 하고, 좀체 쏟아내지 않을 듯한 속내가 신비롭다. 규슈의 서북단에 자리잡은 나가사키현은 일본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현이다. 현 내쓰시마와 부산이 직선거리로 49.5km. 맑은 날이면 맨눈으로도 한국땅이 내다 뵌다. 시차걱정 없고 기후도 비슷해서 철지난 옷을 챙길 번거로움도 없다. 다만 해안도시라 바람이 생각보다 만만찮다. 인천공항을 떠난지 1시간20분 남짓. 비행기가 나가사키공항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산자락을 따라 오밀조밀 파고든 가옥들이 정겹다. 우리네 해안 포구마을에서 마주칠 법한 낯익은 풍경이지만 군더더기 없이 담박하다. 공항을 빠져 나와 제일 먼저 만나는 나가사키시. 일찍이 터놓은 뱃길 덕택에 곳곳에 스며든 이국의 숨결이 작은 지구촌을 이룬다. 때마침 거리는 중국의 설날인 춘절을 기념하는 란탄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거리를 수놓은 1만2천여개의 연등행렬이 이내 축제의 밤을 밝힌다. 축제는 설을 시작으로 보름 남짓 열린다. 시 남단의 미나미야마테 언덕기슭에 위치한 그라바공원. 글로버라는 영국상인의 주택을 중심으로 메이지 시대의 서양가옥을 한곳에 모아두었다. 언덕배기를 따라오르면 나가사키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방의 항구도시에서 만나는 서구. 낯섦보다 이방인의 공간을 품어안은 넉넉함이 여유롭기까지 하다. 현의 동쪽끝에 자리한 시마바라반도는 물이 좋기로 유명하다. 명성대로 운젠, 오바마 마을등 온천명소가 많다. 벳부만큼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려한 경관과 기분좋은 온천욕까지 호젓한 여가를 즐기기에 손색없다.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인 운젠. 작은 도시 곳곳에 온천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대기에 스민 유황냄새가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다.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열탕, 사방으로 뭉근하게 퍼진 뜨거운 김, 땅 속 물질과 물이 여기저기서 솟구친다. 지옥의 그것과 흡사하다해서 이름 붙여진 운젠지옥. 벳푸지옥보다 사람손을 덜 타 자연미가 돋보인다. 입장료도 없다. 잠깐동안의 황천순례지만 허기를 달래라고 입구에선 찐계란과 사이다를 판다. '라무네'라는 사이다병 안에 유리구슬이 들어 있어 급하게 마시면 구슬이 병 입구를 막아버린다. 지옥 곳곳에 얽힌 사연도 가지가지. 치정에 얽힌 정부와 남편을 죽이고만 여인, 죄값을 치른 자리에 생겨난 여인지옥 등. 계란과 사이다로 양껏 채워 두었던 배가 어느새 꺼져 버린다. 온천휴양지답게 거리는 정갈하고 조용하다. 서양식호텔은 물론 일본식 온천여관 스파하우스도 있다.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지붕색은 하나같이 벽돌색이다. 주변경관과의 조화를 해칠 것을 우려한 공원내 숙박시설 건축규정이란다. 유황천이라 류마티스, 부인병, 피부미용에도 좋다. 여관 호텔의 욕탕과 노천탕 이외에 공중욕탕도 있다. 산속의 노천탕, 시린 코끝에도 달구어진 온몸이 달뜬다. 안개가 얼어 나무가지에 엉겨붙은 무빙(霧氷)이 가는 겨울의 아쉬움을 달랜다. 운젠에서 차로 30분거리에 해수천으로 이름난 오바마 마을이 있다. 둑에선 바닷물을 치고 뿜어오르는 온천이 그대로 보인다. 해안을 끼고 있는 노천탕, 만조 땐 타는 듯 붉은 바다가 눈앞에 넘실댄다. 따뜻한 사케(정종) 한잔 기울일 여유가 있다면 세상 더 없는 호사다. 같은 시간 속의 다른 세상. 그리고 또 다른 세계로의 초대가 이어지는 나가사키 여행. 가벼운 바랑 하나에는 모두 담을수 없는 추억이 넘치는 곳이다. 나가사키=강은정 기자 jiayo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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