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라운드할 때 색깔 볼을 고집했다. 주로 연두색 볼을 사용했는데 시력이 안좋아 확인하기 쉽게 색깔 볼을 쓴 것 같다. 색깔 볼과 관련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정 명예회장이 80년대 중반 신격호 롯데 회장과 골프를 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약속한 날 눈이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내렸다. 신 회장은 골프치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망설이는데 정 명예회장이 골프장으로 떠났다는 전갈이 와 차나 한잔 할 작정으로 골프장에 갔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은 골프 복장을 하고 신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 회장이 "이런 날씨에 골프를 칠 수 있을까요?"하고 묻자 정 명예회장은 "눈이 와서 그렇지 골프치기엔 아주 좋은 날씨인데요.그래서 눈 위에서도 잘 보이도록 빨간 볼을 가져왔습니다"라며 빨간 볼을 내보이고는 웃었다고 한다. 신 회장은 골프한 지 40년 만에 눈 속에서 처음 라운드해 보았다고 한다. 정 명예회장은 그 눈 속에서 20대 청년처럼 박력넘치게 플레이했다. 장성환 전 교통부장관은 뉴코리아CC에서 정 명예회장과 가끔 라운드를 했는데 골프매너가 훌륭했다고 회상했다. 티오프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은 기본이었다. 플레이할 때는 자신감 넘치고 당당했다. 장타자면서도 그린에서는 퍼팅에 집중하는 등 어느 한 가지에 편중되지 않은 고른 골프실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여유있게 치면서 남을 잘 배려하는 좋은 파트너였다고 기억을 되살렸다. 정원식 전 국무총리는 강원도 한 골프장에서 정 명예회장과 골프를 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몇번째 홀을 지나 정 명예회장과 나란히 앞에 우뚝 솟은 설악산을 바라보면서 걷고 있었다. 홀과 홀 사이의 거리가 꽤 돼 한참을 걸었다. 그런데 정 명예회장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던 길을 되돌아 갔는데 모퉁이를 돌아 내려가니 정 명예회장이 깊은 상념에 젖어 물끄러미 서 있더라는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정 전 총리를 보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또 직업의식이 발동한 모양이야"하면서 "홀과 홀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많은 면적의 땅이 놀고 있는데 이 땅을 어떻게 쓸 수 없을까 하고 생각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 명예회장은 골프를 치면서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이를 즉각 사업과 연결시키는 '사업가 기질'이 배어있었던 것이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