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과 주변 유적인 ''융.건릉, 용주사
등은 이른바 ''효 기행코스''로 이름높다.

조선 정조의 효심이 이들 유적에 녹아 있는데다 건축미학과 가능성이
매우 뛰어나다.

화성에는 특히 IMF 극복에 필요한 실사구시의 실학정신이 배어있어 요즘
관광객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

화성은 2백여년전 조선문화의 절정기에 현재의 수원시내에 둘레 5.5km로
축성됐다.

성문격인 팔달문과 화홍문, 정자인 방화수류정 등은 조선후기 건축물의
백미로 꼽힌다.

화성은 임진왜란때 많은 읍성들이 쉽게 함락됐던 약점을 치밀한 설계로
보완했다.

성문앞에 반항아리형으로 쌓아 성문을 수호한 "옹성", 성벽에 접근한 적을
좌우에서 퇴치하기 위한 "치성" 등을 갖췄다.

또 국내 최초로 성곽에 벽돌을 사용했다.

원거리 감시용 건물 "공심돈"도 있다.

외형보다 과학성이 더욱 놀랍다.

공사감독관인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화차(손수레)와 거중기(크레인)를
고안, 축성에 이용했다.

거중기는 40여근의 힘으로 2만5천근의 무게를 들어올린 장치로 공사기간을
당초 10년계획에서 34개월로 단축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모든 공사는 실명제로 이뤄졌다.

공사 참가자들에게는 성과급 노임이 지급됐다.

또 공사관련 모든 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금속활자본으로 남아 있다.

6.25때 무너진 성곽을 지난70년대 이를 토대로 거의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

축성배경에는 "외적방어"란 표면적 이유보다 정조의 효심이 크게 작용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서울 휘경동근처에서 옛수원(현재의
화성군 태안읍 일대)으로 이장하기 위해 당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킬 필요가 있었다.

화성축조가 불가피했다.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의 문무신석과 병풍석 문양은 화려하고 섬세하다.

조선 능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이다.

입구에 있는 소나무와 참나무숲, 널찍한 잔디밭 등은 휴식처로 인기다.

정조는 한해에 수차례 능참길에 올랐으며 죽은 뒤에는 융릉 곁에
안장됐다.

그것이 건릉이다.

정조는 또 사도세자의 넋을 달래기 위해 융릉근처에 용주사를 지었다.

용주사는 궁궐양식을 보여준다.

일주문이 없고 대문곁에 기다란 행랑채가 마련됐다.

정조는 효성을 설법한 불경 "부모은준경"을 단원 김홍도에게 그림으로
그리도록 했다.

그 목판본은 이 절에 남아 있다.

특히 대웅전내의 탱화는 국내 처음으로 명암기법이 도입됐다.

전문가들은 탱화인물들의 코가 큰 특징 등으로 미루어 김홍도의 그림으로
추정한다.

<> 교통 =수원역 광장 종합안내센터(0331-229-2785)에서 관광안내서와
지도를 얻은 뒤 답사를 시작하는게 유리하다.

승용차로는 팔달산 서장대아래에 주차, 화성을 둘러보는게 좋다.

화성에서 오산쪽 1번 국도로 20분쯤 남하한 다음 병점에서 우회전하면
용주사에 닿는다.

융.건릉은 용주사에서 서북쪽으로 2km 떨어져 있다.

대중교통의 경우 수원역에서 남문행버스를 타고 팔달문에서 내리면 된다.

또 수원역에는 융.건릉과 용주사행 노선버스가 있다.

< 수원=유재혁 기자 yooj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