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가 슬로플레이

슬로 플레이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골퍼의 적.

그러면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슬로 플레이어는 누구일까.

기록으로 나타난 세계 최악의 슬로 플레이어는 놀랍게도 메이저
우승경력의 정상급프로이다.

이름은 시릴 워커 (영국).

그는 1924년 US오픈에서 우승한 장본인이다.

그가 어느정도로 슬로 플레이를 했는가는 1930년 LA오픈때 사건에서
증명된다.

리비에라GC에서 벌어진 첫날 경기에서도 워커는 저녁먹은후 산책하는
식으로 코스를 어슬렁거렸다.

꽃이 있으면 꽃냄새를 음미했고 새가 있으면 탐조했다.

다른 선수들이 평균 3시간에 라운드를 끝냈다면 워커는 5시간이 걸렸다.

2라운드때는 한술 더 떴다.

그는 세컨드샷을 할때 거리가 1백야드이건 2백야드이건 "그린까지"
슬슬 걸어가 지형을 살피고는 다시 볼이 있는 곳까지 슬슬 걸어왔다.

거기까지는 양반이다.

워커는 이제 쭈그리고 앉아 볼 주위의 검블이나 마른 잎, 잔돌 등을
하나하나 들어 낸다.

그 다음 그는 클럽을 서너개 뽑아 클럽별로 대여섯번 연습스윙을 한다.

이윽고 클럽을 선택했으면 그 클럽으로 다시 대여섯번의 연습스윙을
한다.

그게 전부인가.

아니다.

워커는 스탠스를 잡고난후 이번엔 무려 십여차례의 왜글을 한다.

그 모든 절차가 끝나서야 워커는 "드디어" 샷을 한다.

<> 드디어 경찰도 출동

당연히 워커의 뒤는 서울시내가 무색할 정도의 교통체증이다.

선수들이나 경기위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분노하게 마련.

경기위원은 급기야 6번홀에서 경고했다.

"플레이를 빨리 진행하지 않으면 실격시킬 수 밖에 없어!"

그러나 너무도 "독보적인" 워커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실격 같은 소리 하시네. 이봐 내가 누군가. 난 시릴 워커야. 바로
US오픈 챔피언이지. 이 엿같은 대회를 위해 난 대서양을 넘어 왔어.
그런 나를 감히 실격 시킨단 말인가"

그러나 슬로 플레이에 동조자는 없다.

워커는 9번홀에서 결국 실격통보를 받았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 날 워커인가.

그는 온갖 어휘로 아우성치며 플레이를 계속하려 했다.

경기위원회는 경찰을 불렀다.

"US오픈 챔피언을 쫓아 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워커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우람한 경찰 두명은 삐쩍마른 몸매의 워커 겨드랑이를 양쪽에서 낀후
가볍게 들어 클럽하우스로 데려 갔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워커 코 앞에 대며 경찰 특유의 목소리와 제스처로
말했다.

"이봐, 네가 US오픈 챔피언인지 뭔지 난 몰라. 좌우지간 경기 끝나기
전에 클럽하우스 밖으로 나오면 내가 이 곤봉으로 스윙하게 될꺼야"

<> 묘안은 있다

그 사건후 워커는 US오픈 우승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유명해졌다.

선수들은 워커와 한 조가 되는 것을 적극 꺼렸고 주최측도 워커가
참가신청을 하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워커의 참가를 고의적으로 막을 수는 없는 일.

주최측들은 무엇이든 묘안을 생각해 내야했다.

그 묘안이 과연 뭘까.

알아 챈 독자는 상당한 순발력이다.

그것은 "워커를 언제나 마지막조로 짜고 그것도 혼자 치게 하는 것"
이었다.

규칙상 "조 편성은 경기위원회 마음대로"니까.

< 김흥구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