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대통령의 비자금사건이 요즘 세간의 최대관심거리인가 보다.

며칠전 골프장에 갔더니 캐나다 오늘 골프장에 나오신 여러분은
팔불출이라며 웃었다.

왜 그렇느냐고 되묻자 지금같은 난세에 골프장에 나오는 골퍼는
비자금사건에 관련이 없는 이임에 틀림없고, 그런 사람은 과거 별볼일
없는 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일행 가운데 한사람이 클럽하우스 로비에서 어떤 이가 그린피가
얼마냐고 물으니 누군가가 88억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비자금사건이 우리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골프가 끝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화제는 다시 비자금
이야기이었다.

비자금을 둘러싼 정치인들에 대한 이야기 끝에 며칠전 프랑스에서
드골대통령의 서거 20주년 기념식이 있었는데 수많은 시민들이 참석했다고
전했다.

미국의 권력자들이 깨끗한 까닭은 워싱턴대통령이 연임을 거부한데서
그 발원을 찾을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래서 이 나라에도 그와같은 훌륭한 영웅이 나와야만 나라가 잘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참된 영웅이 나오기가 어렵다고 아쉬워
했다.

그 이유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저 남이 잘 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는 못된 버릇을 지닌 이들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오늘 자신들의 골프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수 있었다고
예를 들었다.

세사람은 죽마고우들이란다.

그래서 적어도 한 달에 두번은 만나서 함께 골프를 하고, 골프를
하면서는 가벼운 내기를 하여 돈을 갹출한 다음 그날 경비로 사용하여
왔다는 것이다.

그날도 그 분들은 내기를 하였다.

그러던 중에 16번홀에 이르러 한 분은 홀컵에서 두발자국도 되지 않게
붙였는데 다른 두사람의 볼은 그린좌우측에 있는 벙커에 각각 들어 갔었다.

벙커에 빠진 두 볼을 모두다 투온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 사람은 간신히 보기를, 다른 한 사람은 트리플보기를 하였다.

그런데 홀컵근처에 멋지게 볼을 붙인 사람이 버디퍼팅을 하려는 순간
두사람은 하나같이 험담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남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데 잘 되는 놈치고 좋은 놈은 없다느니,
핸디를 속였으므로 그날의 내기는 무효라느니 하고, 한편 버디퍼팅을
하려던 사람은 훨씬 전 12번홀엣 티샷을 토핑했었다.

그때 다른 일행들은 하나같이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니라"하며
크게 웃었다.

잘난 사람을 키워주지 않는 세상에 민초를 이끌어 갈 영웅호걸이
나오기 어렵다던 그분은, 그날 자기네들 사이에 있었던 그 상황이
곧 "사촌이 논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의 한 단면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친구지간에도 이러는 세상에서 어떻게 영웅이 나오겠느냐는 논리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고인 되신 필자의 은사 가운데 한분도 말씀하셨다.

이 나라의 가장 큰 병폐는 어떤 사람이 인물이 될 성싶으면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크기도 전에 그의 목을 잘라버리려 드는 사회적
분위기에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당신은 필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발을 들여 놓을 즈음
필자에게 네 글자를 적어 주셨었다.

포벽유죄라고.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