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가지 색 도화지로 '종이조형' 작품 제작, 60점 전시
"30년 넘게 종이와 씨름…남을 만한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
예술가의 길 나선 '코딱지들의 대통령' 김영만 아저씨
"코딱지 여러분 안녕하세요?"
'코딱지들의 대통령', '코딱지들의 히어로' 등으로 불리는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73)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 원장은 어린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렇게 인사한다.

어린이들을 위한 TV 프로그램에서 오랫동안 종이접기를 가르쳐온 김 원장은 '종이조형'라는 새로운 장르의 작품 전시회를 한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종이접기 인생을 살다가 칠순이 넘어서야 첫 개인전을 하며 예술가의 길로 나섰다.

전시회는 25∼29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에 있는 자신의 갤러리 아트오뜨에서 한다.

전시회의 명칭은 '종이와 종이의 섞임: 종이거울 K-1001 12.5'이다.

지난 17일 아트오뜨 갤러리에서 김 원장을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 '종이접기 아저씨'가 개인전을 하게 된 동기는
▲ 단 하루도 종이를 안 만진 적이 없을 정도로 매일 종이와 살았는데 만들어도 그냥 놀잇감이고 방송용이어서 남는 게 없었다.

30년 넘게 종이와 씨름하면서 좀 남을 만한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었지만 그래서 도전했다.

-- 작품 작업은 언제 했나
▲ 5∼6년 전부터 생각했는데 여유가 없었다.

마침 코로나19가 터지고 일이 없어지니까 내 시간이 많아서 너무 좋았다.

이때다 싶어 시작했다.

홍익대학교 응용미술과를 졸업했지만, 그룹전에 3차례 유화 작품으로 참가했을 뿐 개인전을 해보지 못했다.

-- 작품 구상은 어떻게 했나
▲ 2년여간 고민했다.

그러면서 종이를 잘라도 보고, 오려도 보고, 버렸다가 다시 모아서 붙여보기도 하다 보니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 번 손을 타기 시작하니까 아이디어가 계속 머릿속에서 쏟아졌다.

어떤 때는 식사도 안 하면서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 제작에만 꼬박 6개월을 매진했다.

예술가의 길 나선 '코딱지들의 대통령' 김영만 아저씨
-- 어떤 작품들을 전시하나
▲ 9가지 색의 도화지를 접고, 오리고, 자르고, 붙여서 만든 조형 작품들이다.

돋을무늬가 있는 8절 도화지를 12.5㎝ 크기로 자르고, 그 크기의 도화지로만 모든 조형물을 만들어서 캔버스에 붙여 완성했다.

회화나 조각 등 일반적인 장르가 아니다 보니 '종이조형'이라고 이름 붙였다.

90여 점의 작품 중 60점만 추려 전시한다.

-- 작품에 대한 주변 반응은
▲ 동창과 친한 화가들을 불러 작품을 보여주고 전시해도 되겠냐고 물어봤다.

한 사람이라도 별로라고 하면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친구들이어서 그런지 '세상이 이런 작품도 있구나', '너 천재다' 등의 반응이 나왔다.

즉석에서 작품 두 개를 사겠다고 예약한 친구도 있다.

-- 전시회 장소가 접근성이 떨어지는 시골이다
▲ 서울에 이름난 갤러리에서 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나에게는 모두 아까운 작품들이지만 남에게 내세울 만큼의 작품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 활동은 계속할 생각인가
▲ 이번 전시회를 해보고 정말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면 꾸준히 종이조형 작품을 할 생각이다.

그때는 대형 작품도 제작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을 수 있는 서울 인사동 같은 곳에서 전시회를 해볼 생각이다.

-- 종이접기는 언제 처음 접했나
▲ 1980년대 초에 사업을 하려다 실패하고 일본 도쿄에 있는 친구 집에 가서 두 달가량 쉬게 됐다.

그 친구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다가 종이접기를 처음 접했다.

다섯 살짜리 꼬마가 선생님을 따라서 종이학과 사무라이 표창 같은 것을 접었다.

꼬마가 가지고 온 종이학을 다 편 다음에 다시 접어봤더니 너무 어려웠다.

살짝 화가 났다.

미술을 전공했고, 손재주가 있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었다.

다음날 서점에 가서 종이접기 책 몇 권을 사고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 공부했다.

-- 무슨 사업을 했었나
▲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대우실업 광고디자인실에 들어가 6년 정도 그래픽 디자이너로 했다.

과장까지 진급했지만, 광고 전문 기획사를 차리려고 사표를 냈다.

3명의 친구가 투자하기로 했고, 저는 집 팔고 아버님께 돈을 좀 빌려서 서울 여의도에 사무실부터 임대했다.

그런데 그중에 제일 많이 투자하기로 했던 친구가 주식을 하다 돈을 다 날렸다.

개업도 못 하고 3개월 동안 다른 투자자를 찾았지만 실패했다.

당시 돈으로 5∼6억원 정도 날리고 거의 밑바닥까지 갔었다.

예술가의 길 나선 '코딱지들의 대통령' 김영만 아저씨
-- 한국에서 종이접기는 어떻게 시작했나
▲ 일본에서 돌아와 무슨 일을 할까 하다가 종이접기가 떠올랐다.

무턱대고 아무 유치원이나 미술학원에 다니며 종이접기를 하는지 물어봤으나 하는 곳이 없었다.

그때부터 색종이, 도화지, 풀, 가위를 사서 밥 먹을 때 말고는 종이접기만 했다.

종이로 별짓을 다 하는 과정에서 하나둘씩 창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때마다 노트에 그림으로 그려서 기록했다.

-- 종이접기 보급은 쉬웠나
▲ 전화번호부를 펼쳐놓고 서울 지역 유치원과 미술학원 전화번호를 뽑아서 전화했다.

'종이접기 하는 사람인데요.

3명 이상 모이면 무료로 강의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어느 날 한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고, 처음으로 교사 6명을 상대로 5∼7살 어린이들이 할 수 있는 종이접기 강의를 했다.

이후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한 번은 몇몇 유치원이 연합해 교사 30여명을 모은 곳에서 강의했다.

그날 처음 봉투를 받았다.

집에서 꺼내보니 10만원짜리 수표가 있었다.

아내를 껴안고 같이 울었다.

--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는데
▲ 한 선배가 서울 유석초등학교 미술 교사 자리를 소개해줬다.

저학년생에게는 종이접기를, 고학년생에게는 평면보다는 입체 위주로 가르쳤다.

집에서 라면상자, 스티로폼 같은 거 갖고 오게 하고 물감으로 칠하고 로봇이나 자동차, 공룡 같은 것을 만들게 했다.

교실을 우주 공간으로, 해저 기지로 꾸며 보기도 했다.

매년 교내에서 학생 작품 전시회도 했다.

-- 방송 출연도 오래 했다
▲ 종이접기 강의와 미술 교사 생활이 소문이 많이 났는지 당시 KBS 아침마당에서 처음 연락이 와 인터뷰했다.

KBS 1TV 유치원 '하나 둘 셋' PD가 그 인터뷰를 보고 연락해왔다.

88년 올림픽 끝나고 정규 방송 개편하면서 처음 그 프로에 출연했다.

처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송하는 5편을 금요일에 녹화하는데 죽는 줄 알았다.

손을 덜덜 떨리고, 말을 제대로 안 나오고, 땀은 줄줄 흘렀다.

수없이 NG가 났다.

PD가 퇴근도 못 하고 일요일까지 편집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KBS에서만 9년 했고, 중간에 EBS 딩동댕 유치원에도 좀 출연했다.

KBS 2TV '혼자서도 잘해요'는 첫 방송부터 종영까지 했다.

대교방송 '김영만의 미술 나라'도 10년 가까이 했다.

-- 방송 에피소드가 있다면
▲ 2015년 MBC TV 예능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 생방송에 출연했는데 20∼30대가 된 코딱지들이 올리는 글을 보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요리연구가 백종원이 6주 동안 인기 1위로 승승장구할 때다.

"코딱지들 안녕하세요"라고 시작해서 10분 만에 실시간 검색 1위에 올랐다.

어렸을 때 유치원 TV 보며 자랐던 당시 20∼30대가 그 프로의 주요 시청자여서 그랬던 것 같다.

-- 우울증을 앓았다고 들었다
▲ 방송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아이템을 했다.

똑같은 것은 안 한다는 철칙이 있었다.

근데 5년 정도 하니까 내일 5개 아이템을 가지고 가서 녹화해야 하는데 4개만 생각나고 하나가 안 떠올랐다.

그런 경우가 잦다 보니 우울증이 왔다.

다행히 친구 권유로 혼자 국내 여행을 다니면서 고쳤다.

그다음부터는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게 됐다.

대본만 보면 아이템이 떠올랐다.

예술가의 길 나선 '코딱지들의 대통령' 김영만 아저씨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