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 질환에 우울증까지…25년 지났어도 계속되는 후유증
피해자 가족 "정부가 책임 인정하고 재발 방지해야"
[가습기살균제 참사 10년] ①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악몽

[※ 편집자 주 = 오는 31일은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세상에 알려진 지 10년이 되는 날입니다.

건강 피해 신고자 7천535명·사망자 1천687명(8월 20일 기준)에 이르는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최악의 환경보건 재난'으로 불립니다.

기업과 정부의 안전관리 실패로 희생된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화학물질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일깨우고자 피해자 인터뷰와 참사 원인과 제도개선 과제 등을 담은 기사 4건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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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가습기를 조금 지저분하게 쓰지, 물때 조금 끼는 게 어떻다고 그 독약을 거기 넣었을까……."
29일 세종시 조치원 자택에서 만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 이경미(55)씨는 "우리 아이들은 산소통을 지고 다닐 정도는 아니어서 말을 꺼내기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빨간 뚜껑에 살균제를 담아 가습기 물통에 붓던' 25년 전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씨는 "서른 넘어 얻은 아이들이라 더 깔끔을 떨었다.

그저 깨끗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지금도 그 순간을 후회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씨 가족의 삶이 바뀐 것은 1996년 봄부터다.

생후 100일도 되지 않았던 첫째 A(25)씨가 감기에 걸려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건조해서 그러니 가습기를 틀어주라"고 했다.

이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방안이 안갯속처럼 느껴질 정도로 가습기를 틀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연년생으로 둘째 B(24)씨와 막내 C(1998∼2001)군이 태어났다.

육아와 늦은 퇴근에 지쳐 매일 가습기를 닦을 수 없던 부부는 지인이 추천한 옥시의 가습기살균제 '가습기당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씨는 "그때는 그 제품이 정말 고마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가습기가 뿜어내는 수증기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건강이 날로 나빠졌다.

A씨는 하루 서너 번씩 코피를 쏟았고, 음식을 먹으면 그 자리에서 토해내기 일쑤였다.

둘째 B씨는 비교적 건강했지만, 피로회복이 더뎠다.

이씨는 "한번 잠을 자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 가족들이 '잠만보'라고 불렀다"면서 "만성피로가 가습기살균제 후유증임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막내 C군의 증상이 가장 심했다.

2001년 6월7일, 얼굴이 파래지도록 기침을 멈추지 않아 급히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아이 폐가 얼렸다 녹인 두부처럼 구멍 나 있다"고 했다.

불과 한 달 후인 7월8일, C군은 급성 폐렴으로 가족 곁을 떠났다.

이씨는 2011년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처음 공론화했을 때 "우리 가족 얘기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뉴스에 나온 전문가가 폐섬유화 증상을 설명하면서 '얼린 두부' 얘기를 하더라"며 "그제야 내가 살균제를 써서 내 자식이 저렇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2015년 환경부에 가습기살균제 피해 신고를 했다.

2017년 둘째 B씨와 사망한 C군은 2등급 피해자(관련성 높음)로, 첫째 A씨는 3등급 피해자(관련성 낮음)로 인정받았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10년] ①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악몽

◇ "가습기살균제 허가한 국가도 책임 인정해야"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씨 가족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A씨는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는다.

정신과 의사는 어릴 적 사망한 동생 C군에 대한 죄책감이 원인이라고 했다.

이씨는 "큰아이는 병치레가 잦았던 자기로 인해 막내가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서 "가습기살균제 때문이라고 말해줘도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씨의 시어머니도 폐 손상 증상을 보이다 지난 4월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어머니가 아이들 올 때마다 살균제를 넣고 가습기를 트셨다"면서 "손자들을 자주 보여드리는 게 효도라고 생각했는데 최악의 불효를 저질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씨는 현재 남편 이용국(58)씨와 함께 주 6일,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 택배 배송을 하며 두 형제의 치료비와 생활비를 대고 있다.

옥시가 피해보상금을 지급했지만, 부부는 "내 자식의 건강과 바꾼 돈을 어떻게 쓰겠나"라며 아이들에게 맡겼다.

첫째 A씨도 "내 돈이 아니다"라며 보상금 일부를 교회에 헌금했다고 한다.

이씨는 피해자들의 고통도 중요하지만, 고통이 계속되는 이유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람들은 피해자들이 청와대에 초청됐을 때 문제가 다 끝난 줄 알지만 해결된 것은 없다"면서 "가해 기업에 재발방지를 요구하고, 그들과 법정에서 싸우는 사람은 여전히 피해자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습기살균제를 허가한 국가가 책임을 인정하고, 가해 기업에 제대로 된 재발방지책을 요구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지난 2017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을 만나 "정부를 대표해 사과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는 과거 유해성을 무시하고 가습기살균제 사용 허가를 내준 책임을 인정하지는 않았다고 피해자와 시민사회는 지적한다.

이씨는 두 아들이 이제라도 일상을 되찾기를 바란다.

"큰아이는 마음이 건강해지면 좋겠어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일하고 싶다던 어렸을 적 꿈을 되찾았으면 해요.

둘째는 폐 손상으로 입대를 못 했는데 다음 주 다시 신체검사를 받겠다고 해요.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 나라도 우리나라니까 지켜야 한대요.

그 마음이 변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가습기살균제 참사 10년] ①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악몽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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