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인권교육 명예교사 김춘희 씨 "살암시민 살아진다"
학생들 "4·3 더 잘 알게 됐다…여수, 순천도 본받았으면"

"저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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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으로 온 가족 잃었지만, 용서…그래야 평화"
제73주년 제주4·3 추념식을 하루 앞둔 2일 한림여자중학교 도서관에서 평화·인권교육 명예교사로 나선 강춘희(75) 씨는 4·3 당시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 온 가족을 잃은 사연을 꺼내놨다.

때론 덤덤하게 때론 울먹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명예교사의 사연에 도서관에 모인 학생들과 교사 모두가 숨죽여 귀 기울였다.

강씨가 2살 때 마을 청년이던 그의 아버지는 조사를 받으러 군·경에 의해 끌려간 뒤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할아버지 역시 어느 날 경찰에 붙잡혀가 모진 고문 끝에 목포형무소로 이송된 뒤 행방불명됐다.

당시 할아버지는 밤이면 무장대에게 쫓기던 마을 청년들을 마루 천장을 뚫어 그 속에 숨기고, 낮에는 토벌대에게 쫓기던 청년들을 마룻바닥을 들어내 숨겨 목숨을 구하는 등 의로운 일을 많이 했다.

이 일이 어느 날 경찰의 귀에까지 들어가면서 봉변을 당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강씨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평생 4·3의 한(恨)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제주4·3으로 온 가족 잃었지만, 용서…그래야 평화"
7년 7개월….
오랜 기간 4·3의 광풍이 제주를 휩쓸고 지나가는 사이 어린 남동생도 저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특히, 사랑하는 남편과 자랑스러운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를 잃은 할머니는 큰 병을 앓았고, 매일 4·3의 고통 속에서 살다가 홀연히 하늘로 가셨다.

온 가족을 잃고 홀로 남은 강씨에게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은 '4·3과 관련한 가족의 일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래도 세상이 좋아진다면 할아버지의 억울함은 풀어달라'는 당부였다.

할머니는 혹여나 가족의 일을 말했다가 강씨가 곤경에 빠질까 염려했던 것이다.

강씨 역시 70여 년 세월을 사는 동안 4·3을 평생의 한이자 업으로 삼고 살아야 했다.

강씨는 "이번에 제주4·3특별법이 개정되면서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열리게 됐고, 저세상으로 먼저 보낸 동생을 호적 정정을 통해 이제라도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출생신고를 하자마자 사망신고를 해야 하지만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것으로도 기쁘다"면서도 지금까지 일말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제주4·3으로 온 가족 잃었지만, 용서…그래야 평화"
강씨는 마지막으로 "늙은 할머니들이 종종 하시는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 수 있다'는 제주말)는 말은 누구에게 말조차 하지 못할 억울한 삶이라도 참고 견디다 보니 오늘과 같은 봄날이 온다는 말씀"이라며 "서로 용서하고 참고 기다려주는 것이 평화를 이루는 기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명예교사의 강연이 마무리되자 학생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날 수업에는 한림여중 학생들뿐만 아니라 전라남도교육청과 전남도의회, 여순항쟁 연합 유족회 관계자, 여수·순천 지역 교사·학생들이 함께했다.

제주도교육청과 전남도교육청이 제주 4·3 사건과 여수·순천 10·19 사건에 대한 평화·인권교육을 함께 협력하기로 한 업무협약으로 이뤄진 뜻깊은 자리다.

순천 팔마중학교 2학년 문석형 군은 "4·3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제주에 와 강연을 들으면서 4·3을 더 잘 알게 됐다.

제주의 아픈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문 군은 "여수, 순천지역과 비교해 제주에는 다양한 수업을 통해 친구들이 (4·3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다"며 "우리 지역도 본받아서 많은 사람에게 알릴 기회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