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관련 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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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관계를 맺는 것에 동의를 받았어도 상대방이 음주 등으로 심신상실 상태에 빠진 상태라면 강제추행이 인정된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지난 21일 준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김모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수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김씨는 지난 2017년 술에 취해 심신상실 상태에 있던 피해자를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김씨의 혐의를 인정하고 징역 10개월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했다.

반면 2심은 피해자가 범행 당시 의식이 있었지만 술에 취해 기억을 못하는 '알코올 블랙아웃'이라며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김씨와 술집을 돌아다닌 모습이 CCTV 등에 담겨 있어 심신상실로 볼 수 없고 범행 당시 기억만 없을 뿐이라는 판단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일부의 정황만으로 '알코올 블랙아웃'을 겪은 피해자가 의식이 있었다고 봐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연령, 피고인과의 관계, 만나게 된 경위 등을 근거로 피해자의 심신상실 여부를 따져야 한다고 했다.

당시 피해자는 당시 18세였고 김씨는 28세였다. 피해자는 1시간 만에 소주 2병을 마셨으며, 바닥에 눕거나 소지품을 잃어버리는 등 만취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김씨를 인근 건물에서 처음 만나 2~3분간 대화를 한 뒤 함께 술집을 찾아다녔다. 이후 김씨는 피해자를 숙박업소에 데려간 뒤 범행을 저질렀다.

대법원은 "피해자는 이 사건 당시 짧은 시간 동안 다량의 술을 마셔 자신의 일행이나 소지품을 찾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며 "처음 만난 김씨와 함께 숙박업소에 가서 무방비 상태로 잠이 들어 추행을 당할 당시 심신상실 상태에 있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했다.

특히 "피해자와 김씨의 관계, 함께 숙박업소에 간 경위 등에 비춰볼 때 피해자가 김씨와 성적 관계를 맺는 것에 동의했다고 볼 정황을 확인할 수 없다"면서 "이러한 제반 사정에 대한 고려 없이 블랙아웃이 발생해 피해자가 기억을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동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알코올 블랙아웃'을 겪은 준강제추행 피해자와 관련해 대법원이 심신상실에 관한 판단 범위를 넓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법원은 3년여에 걸쳐 이번 사건을 심리했으며, 형사정책연구원에 '알코올 블랙아웃'에 관한 연구용역을 의뢰하기도 했다.

김명일 한경닷컴 기자 mi73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