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 유통망 관리 권한 없어…호주·대만 등은 국가가 관리

한 의약품 유통업체가 인플루엔자(독감) 백신중 일부 물량을 상온에 노출해 국가 예방접종사업이 전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가운데, 이런 사고의 재발을 막으려면 배송 관리 체계를 전반적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백신이 2∼8도에서 배송·보관되지 않으면 구성 성분 중 단백질의 구조 변화 등으로 인해 제품의 효능이 떨어지거나 안전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런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예방 접종의 안전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제조·수입업체, 도매상, 의료기관에서는 백신을 적정 온도에서 보관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껏 정부가 백신의 배송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정부가 국가 예방접종사업을 진행하면서도 유통망을 직접 관리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재 국가예방접종사업에서는 민간이 대부분 백신의 유통을 담당한다.

질병관리청이 독감 예방접종사업 계획을 세우고 이 사업을 시행하지만 백신의 유통을 모두 관할하기 어려운 구조다.

백신 조달 공고는 조달청이 낸다.

의약품 유통사 등 도매업체가 입찰에 참여하며, 낙찰받는 업체가 제조사에 백신을 주문해 유통하게 된다.

계약 업체 선정도 조달청이 진행한다.

조달청은 계약을 체결할 때 백신 운송 및 보관에 대해서도 심사한다.

이 업체가 실제 법적인 유통관리 사항을 준수하는지 여부는 해당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리·감독한다.

질병관리청(당시 질병관리본부)은 식품의약품안전처와 함께 앞서 7월 '백신 보관 및 수송 관리 가이드라인'을 내고 백신 수송 용기의 기준과 보관 시간 등 자세한 사항을 안내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권고안'일 뿐 강제 수칙은 아니다.

실제 가이드라인에는 "본 안내서는 대외적으로 법적 효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므로 본문의 기술방식 '∼하여야 한다' 등에도 불구하고 민원인이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사항이 아님을 알려드린다"고 돼 있다.

이번 백신 상온 노출 사건만 하더라도 정부는 신고를 받은 뒤에야 신성약품의 유통 문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만일 신고가 없었다면 정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대로 접종사업을 시행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유통 과정상의 문제점도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야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신성약품은 독감백신을 직접 배송하지 않고 이 업무를 다른 위탁업체에 맡겼고, 위탁을 받은 업체가 또 다른 업체에 다시 하청을 줬는데 이 과정에서 배송 기사들이 냉장차 문을 열어두거나 백신을 야외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독감 백신 무료 접종 대상자 수를 늘리면서 준비 과정이 부족해져 문제를 더 키웠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앞서 중·고등학생인 만 13∼18세(285만명), 만 62∼64세(220만명)는 국가예방접종 대상이 아니었지만,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으로 독감 예방이 더 중요해짐에 따라 정부는 무료 접종 대상자 범위를 확대했다.

국가사업에 쓸 백신에 대한 유통망을 관리·감독하는 체계가 사실상 부재한 상태에서 이런 문제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이에 정부가 유통망을 관리·감독할 수 있게 제도를 개선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채수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미래질병대응연구센터장은 "가격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현재의 선정 체계에서는 유통 경험이 없는 일반 도매상도 올 수 있어, 관리 강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호주의 경우 국가가 관리하는 업체가 백신 조달에 참여하기 때문에 관리가 된다"고 말했다.

채 센터장에 다르면 호주에서는 제약업체가 주정부에 직접 백신을 배송하고, 이후 주정부와 계약한 배송업체가 각 의료기관에 백신을 다시 배송하는 데 이 유통과정을 정부가 관리·감독한다.

대만의 경우 국가 예방접종백신에 쓸 백신은 제약사가 국가 위생국으로 직접 전달하고, 위생국이 각 위생소에 전달하고 위생소에서 또 의료기관에 제공한다.

영국은 우리처럼 경쟁 입찰을 붙여 물류회사와 계약하지만, 매년 업체를 변경하지 않고 3∼5년 주기로 계약한다.
독감백신 '상온배송' 접종 중단에…전문가 "배송관리 강화해야"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