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26일 경성 외곽 고양군서 일어난 최대 규모 만세운동
101년 전 뚝섬에서도…지게꾼·달구지꾼 모여 "대한독립 만세"

"'민족대표 33인'이나 '유관순 열사'의 이미지로만 굳어져 있던 3·1운동이 바로 우리 동네 이웃들의 살아있는 이야기였음을 알게 됐죠."
75주년 광복절을 앞둔 14일 최창준 성동역사문화연구회 대표는 101년 전인 1919년 뚝섬(당시 경기도 고양군)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돌아보며 이같이 말했다.

서울 성동구 주민들이 모여 꾸린 성동역사문화연구회는 1919년 뚝섬에서도 대규모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수개월간 조사 작업을 했다.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수소문하고, 국가보훈처와 국토지리정보원 등을 샅샅이 뒤져 당시 고양군 최대 규모였던 '뚝섬 만세시위'의 모습을 완성했다.

연구회에 따르면 1919년 3월 26일 저녁 9시께 고양군 뚝도면(지금의 뚝섬) 곳곳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1천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서기를 공격하고, 일부 시위대는 헌병 주재소를 포위하고서 태극기를 흔들기도 했다.

최 대표는 "그날 일본 경찰에 연행된 103명 중 이후 시위 주동자로 기소된 10여명은 대부분 지게꾼, 마차꾼, 소달구지꾼 등 노동자 신분이었다"며 "종교인이나 학생 등 일부 계층에서 시작된 독립운동이 농민·노동자 등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뚝섬은 경성(서울) 동남부의 교통 요충지로, 강원도에서 온 땔감을 비롯해 많은 물자와 사람이 뚝섬나루를 거쳤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이곳에는 달구지나 지게를 이용해 물자를 나르는 짐꾼, 밥과 술을 파는 장사꾼 등이 많았다고 한다.

동시에 뚝섬은 일제의 지방 통치기구인 헌병 주재소와 순사 주재소, 면사무소, 경제 수탈기구인 금융조합 등이 밀집한 곳이기도 했다.

최 대표는 "이 때문에 당시 면사무소 등에 대한 시위대의 공격이 다른 지역보다 더 치열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한다"며 "시위 당일 일본 헌병과 소방수 등도 부상했을 정도로 시위가 격렬했다"고 말했다.

101년 전 뚝섬에서도…지게꾼·달구지꾼 모여 "대한독립 만세"

연구회가 수집한 자료들을 보면 뚝섬나루에 기대 살던 20∼30대 청장년 노동자들은 시위에 앞서 벽보를 붙이거나 유인물을 배포하며 조직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공훈전자사료관에 보관된 당시 벽보에는 "근일 삼천리강산 13도 중 2천만 동포가 모두 소동을 하는데, 왜 뚝도 청년들은 한마디 하지 않는가?", "뚝도 우편안골 우물 앞으로 모여서 만세를 부르되 시간은 오후 7시 30분쯤 되어 부르라"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후 그 유인물의 제안대로 동뚝도리의 '이문동', '야소 교회', 서뚝도리의 밥집 앞 등 곳곳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고 법원 판결문에는 기록돼 있다.

최 대표는 "이문동은 우리말로 '이뭇개'라 불렀던 마을 입구의 문을 뜻하는 것으로 서울숲지구대 인근에 그 흔적이 남아 있고, 야소 교회는 현재의 성수동교회로 짐작된다"며 "뚝섬 만세운동을 좇으며 100년 전 역사가 아직도 근처에 살아 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자료가 많지 않아 당시 그렇게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나 시위의 영향 등에 대한 추가 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며 "지자체가 협조해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역사 발굴사업이 활발히 진행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