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형 잃은 5·18 유족, 진실 규명 증언 창구 역할
"최소한 관심 끌어 돈 벌려고 5·18 폄훼하는 사람은 없어야"
[당신의 5·18] 왜곡 대응 앞장 차종수 팀장의 '두 가지 바람'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은 해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차종수(54) 5·18 기념재단 고백과 증언센터 팀장이 바라는 것은 여전히 5·18 진실 규명만이다.

차 팀장은 20여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뒤 2015년 쉰을 앞둔 나이에 기념재단으로 옮겼다.

지만원씨가 온라인 등을 통해 5·18 당시 광주 시민을 북한 특수군이라는 의미의 '광수'라고 지칭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큰형을 잃은 5·18 유족이기도 한 차 팀장은 광수로 지목된 시민들을 찾아 나서 허구성을 밝히고 전국 각지에서 열린 지씨 측의 대국민 보고회를 쫓아다니며 동향을 파악했다.

그 후로 지씨를 비롯해 인터넷 언론사, 최근 전두환 씨까지 북한군 개입설 등 5·18 왜곡과 관련된 사건마다 차 팀장은 '대응반장' 역할을 하고 있다.

고소, 가처분, 재판까지 관여하다 보니 어느덧 법률 지식도 쌓여갔다.

2017년부터는 행방불명자가 묻혀 있을지 모를 암매장지 발굴 활동을 해왔으며 현재는 고백과 증언센터에서 진실 규명에 필요한 증언을 수집하고 있다.

차 팀장은 암매장, 헬기 사격, 참여 군인, 성폭력 피해자, 기타 시민 등 5개 영역으로 나눠 각계 목소리를 모은다.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난 차 팀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가장과 다름없는 큰 형도 잃었다.

[당신의 5·18] 왜곡 대응 앞장 차종수 팀장의 '두 가지 바람'
차 팀장의 형은 광주 금호고 3학년이던 1980년 5월 19일 이모 집에 다녀오는 길에 계엄군이 시민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 항의하다가 끌려갔다.

교도소에서 풀려난 뒤 수업 일수 부족으로 재수 끝에 들어간 전남대에서 총학, 동아리 등에서 학생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간 형은 모진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1983년 3월 숨졌다고 차 팀장은 전했다.

어릴 적 살던 시골 동네 동창 20여명 중 유일하게 대학에 들어간 똑똑한 형이었다.

남편에 이어 든든한 장남까지 잃은 차 팀장의 어머니는 한동안 화병과 트라우마로 술에만 의지해 살았다고 한다.

차 팀장은 22일 "5·18이 나와 가족에게 어떤 의미일까요"라고 반문하고는 "나뿐 아니라 진실규명 활동 중에도 한 인생, 가정이 송두리째 무너진 사람들을 만나고 눈물 흘릴 때가 너무 많다.

국가 폭력으로 가정이 송두리째 파탄 나고, 무너지는 가슴 아픈 일은 더는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 팀장은 "21대 국회에서라도 왜곡 처벌법을 제정해 최소한 관심을 끌어 돈을 벌려고 5·18을 폄훼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정부 차원의 보고서, 백서를 발행해 후세들에게 정당한 역사로 평가될 수 있도록 해 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차 팀장은 꽃다운 나이에 희생된 형에게 뒤늦게라도 명예 졸업장을 바치고 싶은 마음에 전남대 민주동우회, 형과 동아리 활동을 했던 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5·18, 그 이후 40년 세월을 관통한 아픔을 간직한 채 진실 규명을 외쳤던 차 팀장의 두 번째 바람은 형의 명예 회복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