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인문학 산책 -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36) 우울(憂鬱)
독일 화가 루드비히 크나우스(1829~1910)의 ‘우울한 사람’(1877년, 유화,82×61.5㎝). 독일 베를린 역사박물관 소장.

독일 화가 루드비히 크나우스(1829~1910)의 ‘우울한 사람’(1877년, 유화,82×61.5㎝). 독일 베를린 역사박물관 소장.

18세기 영국 낭만주의 전성기를 구가한 위대한 시인이 있다. 바로 존 키츠(1795~1821)다. 그는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말을 타다 떨어져 사망했고 어머니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키츠의 태생적인 감수성은 이런 가정환경과 결합해 그를 심한 우울증으로 내몰았다. 키츠는 25세 젊은 나이에 폐결핵에 걸려 요절했지만, 셰익스피어와 견줄 만한 시인이 됐다.

그는 불우한 환경을 오히려 자신의 위대함을 발휘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우울 증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깊은 물에 잠겨 있어. 내가 아무리 발을 차도 위로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아!”

우울

누구나 인생의 여정에서 키츠가 언급한 고뇌를 한번쯤 경험하기 마련이다. 어떤 이는 갑자기 들이닥친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려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다. 삶을 돌아보며 지금의 현실과 과거에 열망했던 삶의 간극 때문에 자신에게 실망도 한다. 이런 우울한 감정은 대부분 검은 구름처럼 시간이 지나면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몇몇 사람에게는 이런 감정이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심화된다. 그들은 자신을 세상에 쓸데없는, 미움과 증오 그리고 동정의 대상으로 여긴다. 삶이 이젠 짐이 돼 점점 걸머지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1905~1997)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의 의미’를 찾을 때 살맛이 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가시적인 공간과 비가시적인 시간을 차지하면서 이 조그만 육체를 충족하고 정신을 만족시키다가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생존하는 것인가? 우리가 스스로를 존경하고 그럼으로써 타인도 그렇게 여기는 마음은, 우리 인생을 작동시키기 위한 에너지다.

시대의 영웅

아이아스는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명예가 실추됐다고 믿었다. 아킬레우스의 무구가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의 결정으로 그 야비한 오디세우스에게 돌아간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가치를 남들의 평가와 존경에서 찾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치적을 이룬 사람에게 그에 합당한 명예를 수여했다.

‘명예’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티메(time)’는 기원전 12세기 호메로스 시대의 영웅이 당연히 지닌 덕목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을 때 새로운 영웅의 모습과 가치가 등장했다. 이제 명예는 제한된 도시에 거주하면서 자신과 다른 이념과 이상, 관심을 지닌 타인들에게서 타협과 숙의를 이끌어내는 지도자에게 주어진다. 호메로스 시대의 영웅이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라면 아테네 시대의 영웅은 남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공동의 최선을 도출하는 기술, 즉 ‘설득의 기술’을 지닌 자다. 오디세우스는 새로운 시대의 영웅이다. 아이아스는 호메로스 시대의 영웅처럼 가부장적이다. 그는 아내 테크멧사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한다.

복수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는 286개 조항의 법을 제정해 제국의 기반으로 삼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알려진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 정의였다. 아마도 기원전 12세기 호메로스 시대의 정의는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복수를 사용했을 것이다. 기원전 5세기 복수는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복수’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네메시스(nemesis)’는 복수의 대상이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이 됐다. ‘복수’라는 폭력을 행하는 자가 그 복수의 대상이 된다. 아이아스가 미몽에 빠져 저지른 폭력적인 복수의 칼날은 자신을 해치는 무기가 됐다. 복수는 결국 자신에게 가하는 비극적인 행위다.

복수에 성공했다고 자축한 아이아스는 막사로 돌아와 사체로 가득한 광경을 보고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치며 울부짖고, 죽어 쓰러진 양 떼 더미 속에서 자신의 머리털을 쥐어뜯는다. 그는 울부짖는 황소처럼 저음으로 울기 시작한다. 자신의 칼에 죽은 짐승들 가운데서 식음을 전폐하고 말없이 웅크려 앉아 있다. 테크멧사는 아이아스가 깊은 실의와 우울증에 빠져 무언가 끔찍한 것을 꾀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아이아이’

아이아스는 말한다. “아이고 아이고! 내 이름이 내 불운에 이렇게 들어맞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소포클레스는 비극적인 주인공들의 이름에 그 성격을 숨겨놓았다. 오이디푸스는 ‘발이 퉁퉁 부은 자’란 뜻이고 아이아스는 ‘통곡하는 자’란 뜻이다. 아이아스는 그가 처한 운명을 깨닫고 자신의 이름과 연관된 그리스어 감탄사 ‘아이아이’를 반복한다. 아이아스는 불운에서 벗어날 가망이 없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수치라고 생각한다. 그는 “고귀한 사람이라면 명예롭게 살거나, 명예롭게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테크멧사는 자살을 결심한 아이아스에게 간청한다. 과부가 될 자신과 고아가 될 에우리사케스의 처지를 상상해 보라고. 아이아스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었다. 하인의 손에 이끌려 아들이 오자 아이를 번쩍 들고 얼굴을 보며 말한다. “내 아들아, 너는 네 아비보다 행복하되 다른 점에서 닮도록 하여라!” 그리고 그에게 명성을 준 방패를 아들에게 선사한다. “에우리사케스야! 네 이름의 출처가 된, 일곱 겹 소가죽으로 된 이 뚫리지 않는 방패는 네가 지니되, 단단히 꿰맨 손잡이를 쥐고 휘둘러라.”

아이아스는 테크멧사에게 아들을 데리고 막사 밖으로 나가 문을 닫으라고 요구한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우울의 늪에 빠진 아이아스! 그의 선택은 무엇인가?

기억해주세요

명예롭지 못한 삶의 연명을 수치로 여기는 아이아스…우울은 이상과 현실의 정신적 화해가 어긋난 상태죠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1905~1997)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의 의미’를 찾을 때 살맛이 난다. 우리가 스스로를 존경하고 그럼으로써 타인도 그렇게 여기는 마음은, 우리 인생을 작동시키기 위한 에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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