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공공기관에 다니는 한모 사원(37)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전사를 통틀어 ‘막내급’이다. 그는 취업 전선에 늦게 뛰어든 ‘늦깎이 취준생’은 아니다. 한 사원은 4년 전까지만 해도 입사 동기 중에서 진급이 가장 빠른 ‘대리님’이었다. 하지만 결혼 뒤 출산하면서 직장을 그만뒀다. 그러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다시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과장을 달고 승승장구하는 예전 회사 동기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했다. 한 사원이 올해 초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이유다.

육아수당 지급, 사내 어린이집 설치 등 다양한 복지를 제공하는 회사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출산과 자녀 양육 등을 이유로 일터를 떠나는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들은 여전한 게 현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도 아이 양육과 집안일 때문에 사회생활을 접은 데 대한 아쉬움이 커지기 쉽다. 스펙을 썩히기 아깝거나 외벌이로 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해 새 직장에 도전하는 재취업자들이 늘고 있다. 경단녀에서 신입사원으로 변신한 김과장 이대리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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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취업은 다시 ‘미생’ 시작하는 기분

오랜 업무 공백기를 끝내고 입사한 경단녀 출신 신입사원들은 ‘미생’을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중견 정보기술(IT)업체에서 웹디자이너로 5년간 일하다 5년 전 퇴직한 정모씨(40)는 최근 프리랜서 웹디자이너로 재취업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하면서 시간적 여유가 생기긴 했지만, 하루 종일 직장에 있을 수는 없어 프리랜서를 택했다. 프리랜서로 재취업한 건 사내 어린이집 같은 복지시설을 갖춘 안정적인 직장을 찾지 못한 이유도 있다.

정씨는 “일거리를 달라고 예전에 함께 일하던 동료들에게 전화를 돌렸는데 모두들 어엿한 중간관리자가 돼 있었다”며 “직급 관리자가 한없이 높아 보이는 ‘미생’의 삶을 40대에 새로 시작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프리랜서 생활을 하다가 아이가 더 크면 보다 안정적인 직장을 알아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뒤늦게 직원 복지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곳에 입사한 이들은 첫 직장으로 연봉만 높은 곳을 골랐던 것이 후회된다고도 말한다. 작년 한 공공기관에 취직한 이모 사원(34)의 첫 직장은 대형 건설사였다. 그는 입사 초만 해도 대학 동기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샀다. 업무 시간이 긴 대신 연봉이 높고 해외파견 근무 기회 등도 많아서였다. 하지만 출산 후 육아를 시작하고부터는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회사의 모습이 단점으로 변했다. “뒤늦게 복지 혜택이 좋은 곳을 찾아서 신입으로 입사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좋은 직장에 들어갈 걸 그랬어요. 저와 같은 시기에 이곳을 첫 직장으로 골라 입사한 선배들은 이미 ‘상사님’이에요.”

블라인드 채용 공략해 재취업 성공하기도

경력 단절 이후 재취업에 성공한 직장인들은 결혼 여부, 자식 유무 등을 따지지 않는 업계를 집중 공략하거나 전문 경력을 쌓아놓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올해 한 공공기관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윤모 사원(39)은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 덕을 톡톡히 봤다. 출산 직후 전업주부의 길을 택했던 윤 사원은 둘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사회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그런 그에게 공공기관의 블라인드 채용이 용기를 줬다. 블라인드 채용을 할 때는 이력서에 출신 지역, 혼인 여부 등을 적을 필요가 없다. 윤 사원은 2년간의 준비 끝에 모두가 부러워하는 ‘신이 숨겨둔’ 공공기관에 합격해 만족해하며 출근하고 있다.

이모씨(41)는 반대로 재취업한 새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다. 이씨는 어린이집 교사로 재취업한 지 3개월 만에 사표를 쓸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 취업을 위해 공백기에 보육교사 자격증까지 땄지만 일을 해보니 힘에 부쳤다. 이씨는 “원래 하던 일은 마케팅 쪽이었는데 그만둔 지 10년가량 지났다”며 “누구나 대체할 수 있는 마케팅보단 전문적인 직군에서 일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든다”고 말했다.

“회사, 가정 모두에서 ‘죄인’된 기분”

무사히 재취업에 성공해 경단녀에서 벗어난 신입사원들도 고민은 있다. “회사와 가정 모두에 잘못하는 것 같다”는 얘기다. 국내 한 IT기업에 재취업한 이 과장(36)은 요즘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이 과장은 새 직장 동료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라도 업무에 빨리 적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네 살배기 아이 때문에 늦게 퇴근하기는 어려워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이의 유치원 등원 준비로 이마저도 쉽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 과장은 퇴근 후 집에서도 ‘죄인’이 된 기분이다. 낮 동안 육아는 친정어머니의 몫이 됐고, 저녁 6시에 정시 퇴근을 해도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3시간에 불과해서다.

아이를 돌봐줄 친인척이 없는 직장인들은 “한 사람이 버는 돈이 다 양육비로 나간다”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한다. 얼마 전 화장품 제조업체에 재취업한 한 대리(35)는 “회사에서 200만원 중반의 월급을 받는데 도우미 비용을 제하고 나면 실제 살림에 보태는 돈은 몇십만 원에 불과하다”고 털어놨다. 양가 부모가 모두 지방에 거주하는 한 대리는 재취업하면서 육아 도우미를 고용했다. 한 대리가 평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아이를 돌봐주는 조건으로 도우미 아주머니께 드리는 돈은 월 180만원가량이다. 한씨는 “이대로 일하는 게 맞는 건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조아란 기자 arc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