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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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집권한 신군부는 정부투자기관에 퇴직금 지급률을 하향 조정토록 지시했다. 당시엔 1년 근속에 30일(1개월)분의 평균임금을 지급하는 단수제와 근속 기간이 늘어날수록 지급액이 누진적으로 증가되는 누진제 관행이 있었다. 퇴직금 단수제는 근로기준법에 의한 최저 기준이고 누진제는 대체로 근로기준법상 법정퇴직금을 상회하는 기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퇴직금 누진제는 지불능력이 좋은 대기업과 공공기관인 정부투자기관에 많았다. 신군부는 정부투자기관의 퇴직금 누진제를 공무원의 퇴직금 지급 수준으로 맞추라고 하향 조정을 지시한 것이다. 그런데 퇴직금제도는 대부분 취업규칙에 규정돼 있다. 당시 취업규칙 법리에 의하면 불이익 변경 시에는 근로자 과반수 동의를 얻어야 개정 효력이 인정된다고 봤다.

1977년 7월26일 선고된 ‘77다355 판결’은 종전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이익하게 변경할 때는 기득권 보호와 근로조건 대등결정의 원칙 등을 근거로 취업규칙의 적용을 받고 있는 근로자 과반수 동의를 얻어야 하고, 동의를 얻지 못한 채 불이익하게 변경된 취업규칙은 무효라고 했다. 대법원은 이후 일관되게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전에 근무하던 근로자는 물론 변경 후 입사한 신규 근로자에 대해서도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못한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은 무효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대법원 1990년 4월27일 선고, 89다카7754 판결 등). 이들 판례는 입법에 없는 내용을 해석을 통해 보충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이들 판례는 1989년 3월 근로기준법 개정 시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은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명문 규정으로 반영됐다(현행근로기준법 제97조제1항 단서).

퇴직금은 취업규칙의 필요적 기재사항이다. 당연히 정부투자기관 사업장에서 퇴직금 누진제의 하향 조정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해당한다. 당시 대법원의 일관된 입장에 따르면 근로자 과반수 동의를 얻어 변경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신군부 정권에 의한 하향 조정 지시는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근로자 과반수 동의가 없어도 하향 조정해야 했다. 민간사업장의 퇴직금 누진제 하향 조정이 덩달아 이뤄지는 일도 발생했다. 서슬 퍼렇던 제5공화국 시절에서는 노사 모두 이와 관련한 법적 하자나 이의를 제기하기가 어려웠다.

신군부의 퇴직금 누진제 하향 조정

[대한민국을 흔든 판결들] "불리하게 변경된 취업규칙, 신입엔 유효"… 경영 유연성 부여
198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우리사회는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됐다. 정부투자기관 노동조합은 드디어 수년이 지난 시점에서 퇴직금 누진제를 하향 조정한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의 효력을 다투기 시작했다. 당시 대법원의 일관된 입장에 따르면 5공 시절 강행된 퇴직금 누진제 하향 변경은 대부분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못해 무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례에 노동조합은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대법원은 종전 입장에 의할 경우 적지 않은 부담이 됐을 것이다. 퇴직금 누진제 하향 조정은 불이익 변경에 해당하고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 명백한 상태에서 그 변경은 무효로 될 것이고, 그로 인해 하향 조정된 금액만큼 소급 지급돼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투자기관에서 좀처럼 마주하기 어려운 거대 예산수요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런 파장은 민간사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입사 시기 기준 기득권이익 침해 판단

결국 대법원은 퇴직금 누진제 하향 조정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그런데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의외의 묘수를 내는 결정을 내렸다. 즉 1992년 12월22일 선고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91다45165’ 판결에서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않고 변경된 취업규칙이라도 변경 후 근로관계에 들어선 신규 입사자에 대해서는 종전 취업규칙이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한다고 했다. 취업규칙을 불이익하게 변경하는 경우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무효라는 것이 대법원의 일관된 견해지만, 다만 변경 전 입사한 근로자에게는 그 변경으로 기득이익이 침해돼 종전 취업규칙이 유효하다고 봤다. 하지만 변경 후 입사한 근로자에 대해서는 기득이익 침해가 없으므로 종전 취업규칙이 적용돼야 한다고 볼 근거는 없다고 한 것이다.

또 종전까지 근로자 과반수 동의를 얻지 못한 불이익 변경 전후 입사한 근로자 간의 차이를 불문하고 모두 무효로 판단한 대법원의 앞선 판결들은 폐기했다. 말하자면 퇴직금 누진제 하향 조정을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조정 전 입사한 근로자들은 누진제를 적용받고, 조정 후 입사한 근로자들은 하향 조정된 단수제 적용을 받는다는 것이다.

“취업규칙제도 훼손” 반대의견도

대법원 다수의견에 대한 반대의견도 꽤 설득력이 있었다. 취업규칙은 속성상 규범적 성격을 가지고 획일적·통일적으로 적용되도록 해야 하는데 다수의견에 의하면 하나의 사업장에 많은 취업규칙이 있게 된다. 또 다수의견은 대법원 판결(1977년 7월26일 선고, 77다355 판결)이 든 근거 세 가지 중 기득권존중 원칙만 취하고, 근로자 보호 정신과 집단적 결정을 통한 근로조건 대등결정의 원칙이라는 두 가지 근거를 배제했다는 것이다. 결국 다수의견은 동일한 사업장에서 수많은 취업규칙이 병존할 수 있고, 사용자가 기존의 취업규칙보다 근로자에게 불리한 새 취업규칙을 일방적으로 작성해 새로 취업하는 근로자와 근로계약을 체결하면 유효하게 되기 때문에 취업규칙 제도의 취지를 없애 버릴 수 있다고 했다.

하여간 이 같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직후 수십 건의 퇴직금 누진제 하향 조정 유사 판례가 같은 취지로 줄을 이었다. 이 판결에 대해 노조 측은 불만이 많았을 것이고, 퇴직금 누진제를 하향 조정한 정부투자기관들은 안도했을 것이다. 학자 간에는 이를 지지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으로 나뉘어 오늘날에도 백중세가 유지되고 있다. 1992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91다45165 판결은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다.

‘상대적 유무효’ 판단 여유 확보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과 관련한 논쟁은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뜨거운 이슈로 제기되고 있다. 초기에는 취업규칙 작성과 변경 시 근로자 과반수의 의견청취 의무만 규정돼 있던 것이 현행법은 대법원의 보충적 해석에 힘입어 불이익 변경 시 근로자 과반수 동의를 얻도록 하는 명문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기업환경이 변화돼 취업규칙의 일부 근로조건 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그것이 근로자에게 불리한 조정이라면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에 유연한 대처가 어려울 수 있다.

위의 퇴직금 누진제 하향 조정 사건은 이에 해당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이 엄격한 여건에서 1992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91다45165 판결이 가지는 의미는 근로자에게 불리한 취업규칙 변경이 절대적 무효가 아니라 입사 시기에 따라 상대적 유·무효를 적용한다는 유연성을 확보했다는 것에 있다.

■ 기업 경영 악화돼도 취업규칙 변경 못하는 건 '맹점'

우리나라 취업규칙 제도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독일 등 서구에서는 주요 근로조건이 산업별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 간 협상에 의해 산업별로 정해지고, 이것을 각 사업장에 적용하는 기준을 정하는 종업원 조직이 따로 있다. 노사 간 협상에 의해 운영되므로 사용자가 제정하는 취업규칙과는 다르다. 우리나라 취업규칙은 단체협약을 위반할 수 없기 때문에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제정하는 데 제약이 있다.

우리나라의 취업규칙 쟁점은 근로자에게 불리한 변경이 거의 불가능해 기업이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취업규칙의 제정은 사용자가 할 수 있지만 불리한 변경은 근로자 과반수 동의를 얻어야 효력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여러 필요성이나 절차적 합리성 여부를 따져서 동의에 갈음할 수 있는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으면 동의를 얻지 못한 변경이라 하더라도 유효성을 인정해주는 판례가 확립돼 있기도 하다. 다만 이 이론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시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명문의 규정을 배제하는 해석일 수 있다는 도전을 받고 있어 향후 입법적으로 정비될 필요가 있다.

이상희 < 한국산업기술대 지식융합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