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첫 대통령 파면] 기업을 '강요당한 피해자'로 본 헌재…향후 재판에 영향 미치나
헌법재판소는 10일 박근혜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면서 ‘대통령이 기업으로 하여금 재단법인에 출연하도록 한 행위는 해당 기업의 재산권 및 기업 경영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명시했다. 기업들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자금을 댄 것에 대해 헌재가 ‘정경유착’이 아니라 기업을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헌재는 삼성의 최순실 씨 등에 대한 뇌물 제공 혐의는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헌재의 이번 판결은 9일 시작된 삼성 재판과 SK 롯데 등 대기업 수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전망이다.

박영수 특별검사는 지난 6일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특검 수사의 핵심은 국가권력이 사익을 위해 남용된 국정농단과 고질적인 부패 고리인 정경유착이었다”고 밝혔다. 재단에 774억원을 출연한 기업들을 박 대통령 직권남용의 ‘피해자’로 보기보다는 대가를 노린 ‘뇌물공여자’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최씨 등을 기소한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기업들은 박 대통령 직권남용과 강요의 피해자”라는 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헌재의 판단은 일단 특검이 아니라 검찰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모양새다. 삼성 측도 검찰과 특검 조사에서 일관되게 “삼성은 피해자”라는 주장을 해왔다. 부장판사 출신인 한 변호사는 “헌재가 밝혔듯이 이번 탄핵심판은 형사적 판단을 한 것은 아니다”면서도 “헌재의 판단이 특검보다는 검찰의 시각과 비슷하다고 볼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최근 최순실 게이트 수사를 박영수 특검팀으로부터 넘겨받아 2기 특별수사본부를 가동했다. 헌재의 이번 결정은 검찰 2기 특수본이 검찰의 기존 주장을 유지할 명분을 줬다는 분석도 나온다. 검찰의 2기 특수본부장은 1차 당시와 마찬가지로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이 맡았다.

하지만 법조계는 ‘자연인’ 신분으로 돌아온 박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이뤄지면 기존 입장이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을 내놓는다. 부장검사 출신 한 변호사는 “지금까지의 검찰 수사는 금품 제공 혐의 당사자 일방만 조사한 반쪽짜리 수사였다”며 “박 대통령 대면조사 등이 이뤄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고 말했다.

헌재는 문화·예술계 정부지원 배제 명단(블랙리스트)을 둘러싼 의혹은 판단을 유보했다. 따라서 탄핵심판 내용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의 재판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헌재가 문화체육관광부 인사 개입 논란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블랙리스트와 연결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김 전 실장 등의 방어 논리에 다소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김 전 실장 변호인도 지난달 28일 열린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블랙리스트는 ‘비정상의 정상화’에 불과하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상엽 기자 l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