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팩같은 사각 종이곽에 든 사케(일본 청주) ‘간바레오또상(がんばれ父ちゃん)’은 가격이 저렴하고 맛이 부드러워 한국에서 ‘대중 사케’로 통한다. 젊은층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많아 국내 팩 사케시장 점유율이 70%에 달한다. 하지만 간바레오또상이 정작 사케의 본고장 일본에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무명(無名)의 술이란 점을 아는 국내 소비자는 많지 않다. 바다 건너 한국에서 이 술의 운명을 180도 바꿔놓은 주인공은 간바레오또상 국내 독점수입을 맡고 있는 홍순학 태산주류 대표(63)다.

2일 경기 성남시 시흥동 태산주류 본사에서 기자와 만난 홍 대표는 “일본에서 간바레오또상을 수출하는 유통업체 니가타슈한의 이케다 회장마저 ‘한국에서 이만큼이나 성공할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며 놀라워한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제조공장이 있는 니가타현을 조금만 벗어나도 파는 곳을 찾기가 어려운 술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2006년 시험삼아 8700개만 들여온 물량을 지난해 46만개까지 53배로 늘릴 만큼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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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자카야에 일으킨 ‘팩 사케’ 돌풍

요즘 한국 이자카야(일본식 선술집)에서는 팩으로 된 사케를 흔히 볼 수 있지만 일본에선 아니다. 유리병에 든 사케를 병째 팔거나 잔에 따라 판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팩 사케는 주로 가정 내 음주를 희망하는 소비자들을 위해 마트나 편의점 등에서만 팔린다. 한국에 이자카야가 속속 들어서던 2000년대 초까지는 국내 이자카야들도 사케를 병 째나 잔 단위로 팔았다.

홍 대표는 2003년 이례적으로 팩 사케 수입을 시작했다. 일본 주류업체 메르시안의 900㎖ 용량 ‘우마미히토스지 엔베이’가 그의 선택을 받았다. 홍 대표는 “당시만해도 이자카야는 한국에서 고급 술집으로 인식됐지만 사실 일본에선 서민적 술집이었다”며 “한국에도 이자카야를 대중화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모임 때 비교적 많은 술을 마시는 한국인의 음주문화도 고려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넉넉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을 선호하기때문에 저렴한 팩이 잔 단위로 비싸게 파는 술보다 확장가능성이 있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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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대표의 예상은 적중했다. 국내의 유일한 900㎖ 팩이었던 우마미히토스지 엔베이는 국내 이자카야에서 날개돋친듯 팔려나갔다. 따로 홍보할 필요도 없었다. 이자카야 업주들이 “팩에 일본어가 잔뜩 써있어 일본풍 분위기를 더한다”면서 빈 팩들을 전시용으로 가게 곳곳에 진열해놨기 때문이다. 홍 대표는 “수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한 달에 한 컨테이너씩은 팔았다”고 했다.

○간바레오또상과의 운명적 만남

팩 사케 수입은 그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태산주류는 1990년 설립 이후 10여년간 중국산 고량주를 중점 수입했다. 경쟁이 치열해지고 유사품이 난무하면서 수입 고량주 시장이 정체되자 사케에서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우마미히토스지 엔베이가 대성을 거두면서 이 술은 태산주류의 주력 상품으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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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6년 우마미히토스지 엔베이의 수입 단가가 크게 오르면서 홍 대표는 새로운 도전과제에 맞딱뜨렸다. 가격경쟁력으로 이자카야계에서 승부를 보기 어려워진 것이다. 때마침 일본 니가타현 서울사무소에서 “니가타현에서 생산하는 술을 수입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다. 그는 고급 사케 수입으로 활로를 열어볼 생각으로 니가타현의 주류업체 ‘니가타슈한’을 찾았다. 하지만 그가 원하던 고급 사케 수입 협상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별다른 소득 없이 귀국편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가는데 니가타슈한의 영업담당자가 “저렴한 팩 제품이 있는데 한 번 보겠냐”며 갑작스런 제안을 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그는 비행기 시간에 쫓기던 중 공항 근처 편의점에 잠시 들렀다. 그 곳에서 간바레오또상과의 ‘운명적 첫 만남’이 이뤄졌다.

홍 대표는 “간바레오또상을 본 순간 첫눈에 반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는 노랫말의 TV광고가 유행하던 때였다”며 “일본어로 ‘아빠 힘내세요’라는 뜻인 ‘간바레오또상’을 보는 순간 눈을 뗄 수 없었다”고 했다. 팩에 그려져있는 짙은 콧수염에 불그스름한 얼굴을 한 캐릭터도 소비자 눈길을 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원래 수입하려던 고급 사케보다 더 나을 것 같다는 직감이 왔다. 홍 대표는 그 자리에서 바로 간바레오또상 수입을 결정했다.
일본의 이름없는 술 '간바레오또상'을 한국서 '사케의 대명사'로…홍순학 태산주류 대표의 '마법'
○품질 위에 스토리를 입히다

홍 대표가 우마미히토스지 엔베이 수입으로 닦아놓은 판로는 간바레오또상 유통에도 큰 힘이 됐다. 하지만 후발 수입 상품인 간바레오또상이 우마미히토스지 엔베이를 제치고 국내 팩 사케 시장에서 1위에 등극할 수 있었던 건 간바레오또상만의 강점과 그에 최적화된 전략 덕분이었다.

간바레오또상이 생산되는 니가타현은 ‘쌀의 고장’으로 불린다. 이곳에선 양조 목적의 쌀을 따로 재배한다. 홍 대표는 “간바레오또상은 물 좋고 쌀 좋기로 유명한 니가타현 고시히카리(벼 품종)로 만들어 맛이 특별하다”고 했다. 쌉쌀한맛(가라구치)과 단맛(아마구치) 사이에서 완성된 특유의 맛은 사케 애호가뿐만 아니라 처음 사케를 접하는 사람도 편하게 즐길 수 있다는 설명이다.

홍 대표는 제품의 강점 위에 ‘스토리’를 입혔다. 그는 “불경기로 고생하는 가장들에게 간바레오또상이 위로가 되길 바랐다”며 “아빠를 응원하는 간바레오또상이 단순한 술을 넘어 문화로 만들려 노력했다”고 했다. 그는 니가타슈한 측에 간바레오또상 캐릭터를 그려 넣은 술잔, 티셔츠, 앞치마 등을 제작하자고 제안했다. 수출업체 측이 해외 저변 확대를 위해 수입업체에 요구할법한 사항을 되레 역제안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굿즈(상품)’가 전국 각지의 이자카야에 공짜로 배포되면서 간바레오또상 유통이 크게 늘었다.

다른 이들이 간바레오또상 캐릭터를 무상으로 사용하는 것도 허용했다.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간바레오또상이 사람들에게 각인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홍보수단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의 폭발적 인기는 일본에 역으로 영향을 줬다. 니가타현을 조금만 벗어나도 파는 곳이 없던 간바레오또상이 지난해 일본 최대의 종합할인매장 ‘돈키호테’ 후쿠오카점에 입점했다. 올해부터는 전국으로 유통될 예정이다. 대만과 캐나다는 한국 교민들의 요청으로 2013년부터 간바레오또상을 수입했다.

임락근/마지혜 기자 rklim@hankyung.com